공지사항 ver.2 (2014.07.15~) 공지사항


1. 반갑습니다. 

 

2. 이곳은 기본적으로 블로그 주인이 사적으로 이용하는 공간이지만, 더불어 대중에게 여과없이 공개된다는 점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제 스스로도 물론 조심하겠으나, 혹여라도 개인적으로 불쾌한 표현이나 논쟁 등을 접하셨다면 주저없이 이 공지사항이나 메모 등에 의견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 더불어 주인장이 판단하기에 타인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표현이나 행위 등은 대화 등으로 시정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이 때에 역시 주인장이 판단하기에 필요하다면 해당 댓글을 삭제 등으로 제재한 후 이를 공고할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4. 상업적 광고는 공지나 경고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5. 존댓말, 반말 다 허용합니다.

 

6. 기타, 주인장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이 공지사항의 댓글을 통해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Campaign 001. 촉발 (1) 소설 작업실

-1-

 

91614:27 (서울표준시)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길 1

청와대, 본관 지하, NSC 위기관리센터

 

, 시작합시다.”

2주 전부터 예정에 잡혀있던 벨기에 상무장관 및 상원의원 세 명과의 오찬 접견을 마치고 막 위기관리센터로 들어서서 상석에 앉은 대통령의 선언과 함께 장내에 앉아있던 몇 명의 남자들이 일제히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파일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LG 디스플레이에서 제작해 청와대에 증정한 상황 브리핑용 120인치 LCD 거대 멀티비전의 앞에 서서 잠시 목청을 가다듬던 정복 차림의 육군 대령이 이윽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대령이 리모콘을 들고 실내 어딘가에 비치된 프레젠테이션용 컴퓨터에 신호를 보내자 청와대의 로고가 새겨져있던 기본 화면에 몇 명의 사진이 떠올랐다. 하나같이 서구적 외모에, 이상할 정도로 귀가 긴 사진이었으나 또한 다들 상당히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대령은 화면을 돌아보며, 아침부터 브리핑을 준비하며 달달 외웠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사실 이름을 외우는 것보다 발음을 매끄럽게 실수 없이 한 번에 마치는 것이 더 어려웠다.

납치당한 시민은 에텔라 메사 무역공사의 아힌스베르크 파견사무소 대표인 르웬사 르 그웬과 레밀리아 레 그랑베르아 부부 및 그들의 자녀인 킬로이, 멜리사입니다.”

…….”

장내에 정적이 흐르는 동안, 대령이 리모콘을 다시 한 번 누르자 이윽고 멀티비전의 화면이 1/500,000의 대축적지도로 바뀌었다. 그 위에 떠있는 지명은 최소한 한반도 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보일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납치는 어제 서울기준시 1900, 현지 시각으로 2000시 무렵, 자치령 북쪽 경계에서 12km 떨어진 상업 도시인 소로스 왕국 로트링겐 공작령 남부의 아힌스베르크에서 발생했습니다. 정보사의 보고에 따르면 납치는 르 그웬 가족이 초대받은 시 외곽 저택에서의 사교 모임을 마치고 숙소로 귀환하는 도중 발생했으며, 최소 10여명 이상의 괴한이 인적이 드문 소로 상에서 마차를 기습한 것으로 보입니다. 격렬한 격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화면 위에 아힌스베르크라고 부연설명이 붙은 지명의 화면이 계속 확대되더니, 비포장 소로 상에 아무렇게나 처박힌 마차의 야간 항공사진이 떠올랐다. 대통령 이하 회의 참석자들이 사전에 받아본 예비 자료와 책상에 놓인 서류에도 같은 사진이 이스라엘제 서쳐-2 무인정찰기가 촬영했다는 설명과 함께 실려 있었다. 뒤이어 마차를 바로 근처에서 촬영한 사진도 화면에 떠올랐다. 소로 옆 도랑에 처박힌 마부의 시체와 바닥의 혈흔, 발자국 등이었다.

이 사진들은 이들의 경호를 전담하던 정보사령부 작전 팀이 현장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경호팀이 있었는데, 어떻게 납치를 허용한 건가?”

대통령이 질문하자, 대령이 차분히 현장 항공사진을 디스플레이에 띄우며 설명했다.

마차가 통과하던 도로는 보시는 바와 같이 직선로가 아닌, 상당한 굴곡이 존재하는 비포장도로입니다. 아마도 괴한들은 이 부분, A지점의 언덕이 상당히 높고, 따라서 이 지점을 따라 굽은 모퉁이를 돌기 전에는 언덕 반대편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B지점 도로 상에 로드블록, 그러니까 교통장애물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해당 지역은 도로폭이 상당히 좁아, 마차가 제 자리에서 돌아 위험 지역을 이탈하기는 용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디스플레이 상에는 항공사진 위에 파란색의 화살표가 나타나더니, 굽이치는 소로를 따라 움직이다 A지점이라 명명된 언덕을 모퉁이 삼아 돈 직후 B지점에 설치된 빨간색의 두꺼운 직사각형에 부딪히는 애니메이션이 연출되었다.

뒤이어 마차에 동승하고 있던 근접경호요원은 통신단말기를 이용해 아힌스베르크의 작전 포스트에 데이터 통신으로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이는 아마도 경호 목적으로 마차에 동승하고 있던 현지 경찰관들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보이며 최초 보고 내용은 긴급. 호위대상에 대한 납치 위협 확인.’입니다. 전체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뒤이어 대령이 다시 리모콘을 조작하자, 화면 오른쪽 하단에 데이터를 이용한 문자통신 기록이 떠올랐다.

 

[백금성 10(20:03) - 긴급. 호위대상에 대한 납치 위협 확인.]

[은하수 06(20:03) - 자세한 상황보고 요망.]

[백금성 10(20:04) - 현 위치 아힌스베르크 남문 인근 소로 상. 경관 두 명 동승 중. 위협 세력 인원 최소 20여 명. 전원 무장 중. 로드 블록 존재 및 후방 차단으로 강행돌파 불가.]

[은하수 06(20:04) - 확인. 대응 매뉴얼에 따라 호위 대상에게 추적전파발신기 분배 바람. 되도록 교전 회피 요망.]

[백금성 10(20:04) - 접수.]

[은하수 06(20:06) - 지원 부대 출발. 10분소요 예상.]

 

통신 내용은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아마도 직후 괴한들이 최소 2회 이상의 폭발 마법 이용을 통해 마차의 방호문을 파쇄하고 강제 진입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출입문이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버린 마차의 사진을 등 뒤로 한 대령의 보고에 대통령이 피곤한 듯 안경 밑으로 오른손 검지와 엄지로 콧잔등을 두어 번 누르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경호 인원은 왜 소수였나?”

대통령의 질문에 대령이 다시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대령이 사전에 모든 질문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하고 나온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그것이 딱히 기껍거나 하지는 않았다. 일단 무엇보다도 지금 닥친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가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마차의 탑승인원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또 현지 치안 당국에서 경관 두 명을 호위로 붙여줬기 때문에 권총으로 무장한 요원 한 명밖에 동승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는 필요 이상의 경호 요원 동승 시 발생할 수 있는 정보누출 위험이나 정치적 마찰 가능성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함이며, 경호팀은 철저히 매뉴얼대로 대응하였습니다. 다만 괴한들이 외진 곳에서 길을 막고 수적으로 밀어붙이니 제대로 된 저항을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분석됩니다.”

매뉴얼을 준수했다는 보고 내용에 대통령이 그저 혀를 차자, 실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좌우를 둘러보며 한번 헛기침을 한 대통령이 다시 대령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하게.”

대통령의 지시에 대령이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화면은 어느새 석조건물과 벽돌로 포장된 도로가 인상적인 큰 도시의 항공사진으로 바뀌어있었다. 그 중 화면의 가운데에 위치한 어느 가옥이 붉은 색 원으로 둘러싸여 강조된 상태였다.

납치당한 직원의 소재는 아힌스베르크 남문 인근의 빈민가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사태 발생 직후, 경호 목적으로 시내 사무소에 배치되어있던 정보사령부 작전 팀이 급파되어 감시를 시작하였고, 이후에는 성층권 비행선과 전술비행선 및 UAV 등의 다층 영상정보수집체계로 감시를 지속 중입니다. 다행히 근접경호요원이 사전에 분배한 전파발신기가 제대로 작동한 것으로 보이며, 호위 대상 4인의 발신기가 전부 해당 건물 내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또한 시내에서 다른 임무를 수행 중이던 별도의 정보사령부 팀도 현장 근처로 이동해 감시망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감시망 확충을 위해 정보사 및 국정원의 현장 요원과 군의 실동부대를 추가로 투입할 계획도 수립 중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대령이 잠시 말을 끊고 화면을 다음으로 넘기자 참석자들이 사라락하고 서류 종이를 넘기는 소리도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흰색의 종이가 회의실의 백색 형광등의 빛을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하게 반사시키는 듯한 불쾌감도 들었다. 대통령은 이 순간에 내포된, 무기질을 연상시키는 차가움이 새삼스럽게 소름끼친다고 생각하며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러 가능성을 고려해 본 결과, 납치범들의 목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인신매매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게. 정치적 테러일 가능성은 없단 말인가?”

상상 이상의 보고를 들은 대통령이 실감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추가 설명을 요구하자, 대령이 약간 곤혹스럽다는 표정으로 대통령 이하 장내 참석자들을 돌아보았다.

전문가들이 여러 분석 틀로 분석한 결과, 최소한 정치적인 요구나 종교, 기타 신념과 관련한 테러는 아닐 것으로 판단됩니다. 또한 몸값을 받기 위한 목적의 납치도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실제로 납치사건 발생 후 19시간이 지난 현 시점까지 납치범들과의 접촉은 일절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 시점으로는 인신매매가 목적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분석입니다.”

…….”

잠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침묵이 장내에 흘렀다.

공식적으로 파견된 준 외교관 급 인사를 동네에 지나가는 깡패들이 단순히 인신매매 목적으로 납치했다는 말입니까?”

김종수 외교안보특별보좌관의 질문에 대령이 부연설명에 들어갔다.

물론 소로스 왕국 외무성에서는 르웬사 씨에게 외교관에 준하는 특권을 인정했습니다만, 그 사실이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닙…….”

그러니까, 그 납치범들에게 그 엘프들이 왕국 내에서도 주목하는 중요 인물이니 건드리면 안 된다는 인식이 없었을 거라는 뜻인가?”

대통령의 질문에 대령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 바로 그렇습니다, 대통령님.”

정보사의 브리핑에도 충분히 반영된 내용이지만, 국정원 쪽 분석관들의 의견도 해당 납치범들은 단순히 엘프 여성과 아이들의 납치가 자신들에게 상당한 금전적 이득을 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최태호 국정원장이 대령을 구원하듯 나서서 설명을 보충했다. 물론 정보보고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관인 정보사와 국정원이 서로의 비중에 대해 견제하는 것은 지나치지만 않다면 일반적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다. 특정 정보에 대한 복수의 건전한 비판을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고, 대통령의 판단이 어느 한 기관의 입김이 지나치게 쏘인 정보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인신매매로?”

대통령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반문하자, 국정원장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대통령에게 부연 설명했다. 대통령이 잠시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납치 대상 중에는 충분히 아름다운 성인 여성과 아직 어리지만 장래에 아름다운 여성이 될 소녀가 끼어있습니다. 일상적인 정세분석보고에 의하면 귀족들 중에는 아직도 비밀리에 엘프 노예를 성적인 목적으로 구매하는 취향을 가진 자들이 아직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것이 산발적인 거래가 아니라 아예 정기적인 암시장이 비밀리에 존재한다는 첩보도 있습니다.”

…….”

대통령은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이 잠시 국정원장을 바라보았다. 인권을 옹호하는 21세기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성노예와 암시장이라는 용어가 현실 사회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상상하는 것은 그로서는 익숙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

잠시의 침묵 후에 다시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좋소. 좋아요. 그럼 우리에게 남은 옵션은 뭐요? 젠장, 거시기 달린 놈들은 이래서…….”

대통령님, 소로스 왕국 외무성과 내무성은 이번 사태에 대해 왕국 수도에 체류 중인 이어주는 자에게 즉각 유감을 표명하고 르 그웬 가족을 수색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약조…….”

대령의 옆에 서있던 외교통상부의 홍영성 지역국장이 서류철을 열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손을 가로저었다.

그런 외교적 수사 말고 실질적으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안이 뭐냔 말이오.”

대통령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장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최태호 국정원장이 대통령을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그도 NSC에 참가하기 전, 국정원 내부 자체 동향분석회의에서 분석관들에게 몇 가지의 시나리오를 브리핑 받았고, 합당하다고 생각된 안건 두세 개를 추려 서류가방에 챙겨온 참이었다.

왕국 내무성이나 지방 치안기구에 정보를 흘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자기네 경찰이나 군을 움직여 우리 쪽 사람들을 구출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쪽도 경관이 살해당했기 때문에, 아마도 정보만 입에 물려준다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겁니다.”

그 정보를 그쪽에서 신뢰하겠습니까? 아니, 그 전에 정보를 어떻게 취득했는지부터 설명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왕국과 우리 간에는 그런 식의 비밀 창구가 없습니다. 실반베르크의 이어주는 자야 그쪽 입장에서는 왕실 내 의전 상의 장식품에 불과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정보가 충분히 신뢰성 있도록 포장을 해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아닌 말로, 서류에 항공사진을 붙여서 전달하면 엘프들이 어떻게 이런 지도를 그릴 수 있었는지 설명을 요구할 테고, 그냥 구두로 전달하면 자기들이 어떻게 그걸 신뢰할 수 있는지 설명을 요구할 텐데 말입니다.”

그거야 저희 쪽에서 충분히 고려할 사안입니다. 안보수석께서는…….”

최태호 국정원장과 우성용 안보수석의 토론, 혹은 말꼬리 잡기가 이어졌지만 듣고 있던 대통령은 썩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팔짱을 끼고 앉아있던 대통령이 위성사진이 떠있는 멀티비전의 화면을 향해 눈을 게슴츠레 흘기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오. 당장 우리는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잖나? 그놈들, 그 장난감 병정들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이 알고 있단 말일세. …… 몇 년 전 아덴만 작전처럼 특수부대를 투입해서 구출할 수는 없겠소?”

대통령의 제안에 우성용 안보수석과 최태호 국정원장이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논쟁이 슬며시 사그라지자, 대신 김종수 외교안보특보가 입을 열었다.

……현지국가와의 충분한 교감이 없는 상태에서 무력을 투입하는 것은 현지 외교 관계와 정세에 심각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측이 동원한 군사무기로 인해 현지에 문화적 충격을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충분한 숙고가 필요한 일입니다.”

동의합니다, 대통령님.”

김종수 특보와, 특보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고 나선 우성용 외교안보수석의 표정도 썩 확신에 가득 찬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전 지구의 외교안보 현안에 대해서는 전문가였으나, 아는 것도 전혀 없고 의사결정체계와, 심지어 사회의 중심적인 사상과 상식조차 한참 구식인 세계의 일에 대해 대통령에게 조언하는 것에도 자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의 의견은 다른 모양이었다. 대통령이 팔짱을 낀 자세로 계속해서 설명했다.

오늘 아침 일찍, 특별자치정부의 헤스마엘 장관의 전언 메모를 읽었는데, 500만 명의 자치령 시민들이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대통령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군.”

장내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쩍 벌렸다. 추가 설명 없이도 그 말의 의미를 다들 이해했던 것이다. 대통령이 쓴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다들 알겠소? 이건 분명히 장관이 월권행위로 내게 정치적인 압력을 넣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건이 이미 사소한 사건의 영역을 넘어섰다는 건 바뀌지 않소. 5백만에 달하는, 우리에게 무척 우호적이고 단결된 현지 사회공동체의 여론이 이번 일로 흔들리고 있단 말이오. 나로서는 단호한 대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소.”

…….”

대통령이 자신의 외교안보분야 참모진을 돌아보았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듯한 상관의 눈빛에 참모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대통령과의 사적인 친분이 깊은 김종수 외교안보특보가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대통령님.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심각한 외교적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외교적 파장이라면, 항의 말이오? 그런 건 넘어갑시다. 어차피 소로스인가 뭔가 하는 왕국이 항의를 하건 말건 그걸 보도할 언론은 없으니까. 그리고 까짓것, 중세시절 기사들이 강 건너에서 열 받아서 길길이 날뛰며 칼 좀 휘두른다고 해서 큰일이나 난답니까?”

대통령이 손을 내저으며 반박했다. 그 말 따나마, 이들은 지금, 존재 자체에 대한 정보조차도 급 비밀로 분류되는 지역에 대해 논의하는 중이었다. 게이트 저 편의 어떤 논란이건 국내 정치에 영향을 줄 수가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분별하게 군사적 옵션을 전가의 보도마냥 휘두르고 다닐 수도 없었다. 일단 특정 지역에 무력이 투사되면 그것이 어떤 성격의 군사작전이건 간에 현지인들의 반발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상대 정부가 입에 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뛰는 것은 당연지사였고 양국의 악감정과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서 지출해야 하는 외교적 비용은 실로 막대할 것이다. 그것은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70년대 이래로 남미와 중동지방에서 특수부대로 들쑤시고 다니면서 몸소 배운 가장 값진 교훈 중 하나였다.

, ……. 대통령님? ‘황색 3에 따른 율도에 대한 연간 수출 규모가……. …….”

우성용 안보수석이 옆에서 특보를 돕고 나서려는지, 헛기침을 한 뒤 자신이 항상 가지고 다니는 서류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비밀보호규정에 의해 급 비밀에 해당하는 서류나 차트, 심지어 메모조차도 그가 가지고 다닐 수는 없었다.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별반 관심이 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대통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우리가 저곳에 물건이나 팔아먹자고 들어간 것이 아니지 않소?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지구상에서 우리의 수출 규모가 확대되고 있어요. 이 상황에서 저쪽 세계에 어디 더 물건 팔아먹을 곳이 있나 기웃거리는 건 우리의 최우선 순위는 아니란 말이오.”

…….”

대통령의 지적에도 일견 타당성이 있었다. 한국 경제는 2000년대 후반 이래로 지속적으로 대외수출량이 확대되어왔다. 원자재 수급 등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지만, 내수만으로 생산을 감당하지 못해 새로운 상품 수출지역도 또한 필요로 하던 1920년대 후반 서구열강들과는 상황이 약간 달랐다. 게다가 한국의 주력 수출품인 전자 제품과 반도체, 대형 선박, 자동차 등은 저쪽 세계에서는 구매 수요가 존재하기는커녕 아직 그 개념조차 등장하지 않았다는 문제도 있다. 한국 경제에서 게이트 너머에 먹힐만한 품목인 설탕 등의 조미료나 종이 등을 생산하는 경공업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했고 자유시장경제인 한국이 단시간에 그런 산업을 육성할 길도 없었다. 한마디로, 지금 한국은 게이트 너머로의 수출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 바로 그 점을 지적해 참모들의 반발과 우려를 억누른 대통령이 자신의 의중을 덧붙였다.

나는 다만 현 상황이 유지되고 더 이상 큰 말썽이 일어나지 않길 바랄 뿐이오. 물론 석유나 금, , 혹은 비싼 원자재를 좀 캐올 수 있다면 더 바랄 것도 없겠소. 하지만 그런 걸 위해선 대규모의 자본이 투입되어야겠지. 6개월 전에 민폐장이 윗동네 놈들이 갑자기 붕괴해서 재건사업에 한창인 지금으로서는 그런 자본을 구할 길이 없소.”

…….”

당장 수출이나 자원 채취를 못한다면, 그저 훗날을 기약해야지 않겠소. 내가 후임한테 정치적으로 안정된 이계의 교두보라는 보물을 잘 간수해서 온전히 넘겨주지 못하면 나는 아마도 조국의 천년지대계를 말아먹은 국가반역자가 되겠지.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오?”

대통령은 그 말을 끝으로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대통령이 지적한 전략적 딜레마는 확실히 그의 참모들도 모두 내심 골머리를 앓고 있던 부분이었다. 1990년에 제13대 대통령이 최초로 견우 현상을 보고 받고 조사를 지시한 이후로 율도에 대한 한국의 정책은 일관되게 현상유지를 지향했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일단 지속적인 인원과 자본 투입으로 현지와의 정치적 결속을 유지하되 기밀유지에 용이한 수준으로 파견 인력과 관련 경제 활동의 규모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지적한 바와 같이 본격적인 자원 개발을 위한 자본 조달도 문제였거니와, 기밀유지에 있어서 필요한 노력은 관계 인력과 자본 증가분의 제곱에 비례해 늘어난다고 할 수 있었는데, 그간 한국은 그 정도의 기밀 유지 및 개발 노력을 비밀리에 자치령에 쏟아 붇는 것에 적잖은 부담감을 느꼈던 것이다.

자치령 시민인 엘프에 대한 납치는 자치령에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다시 말해 이 사건에 대한 대처는 자치령 내에서 서서히 시작되는 한국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었다. 대통령은 이 사안이 정부의 대처에 따라 자치령 내의 정치적 안정이 유지되느냐의 기로에 서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한 듯 했다. 대통령은 만약 적절한 군사적 옵션을 선택한다면 소로스의 반발을 수용 범위안에서 감당하면서 자치령 내의 정치적 불안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한 대통령의 의중을 헤아려본 우성용 안보수석이 입을 다물었다. 그로서도 대통령의 판단이 합리적임을 인정해야 했다. 대통령의 판단은 대통령직 인수 직후부터 외교통상부, 국가정보원 및 직녀성의 전문가들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우선순위에 따른 것이었고, 지금 이 상황에서 자치령의 기대를 저버릴 만큼 정부의 자치령 내 정치적 자산이 확고한 것도 아니었다. 실내의 다른 참석자들도 대통령의 의지가 확고하고, 다른 대안도 딱히 마땅찮다는 사실을 인정했는지 더 이상 군사적 옵션을 동원하는 것 자체에 대한 반대가 없자, 대통령이 다시 대령을 돌아보며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좋아. 대령. 우리가 동원 가능한 군사적 옵션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브리핑해주게.”

대통령의 요청에 멀티비전 앞에서 정자세로 서있던 대령이 준비되었다는 듯이 화면을 불러오며 설명을 시작했다.

, 대통령님. 현재 이런 종류의 대테러작전이나 구출 작전에 특화된 부대인 특수전사령부 제132특수임무대대의 제1특공지역대 정예 작전요원 33명이 자치령 북부의 기지에서 출동 대기 중입니다. 이들은 대통령님도 익히 잘 아시는 특전사 제707특수임무대대와 거의 동등한 수준의 임무능력을 갖췄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작전은? 구체적인 작전은 수립되었나?”

, 대통령님. 주둔군 사령부 정보처의 ASIC, 그러니까 정보종합반에서 각종 자료를 수합해 분석한 결과에 의해 작전처가 군사적 방책 몇 가지를 수립해둔 상태입니다. 현재 지속적으로 현장 정보를 받아 계획을 수정, 갱신 중입니다.”

대령의 깔끔한 대답에 대통령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살짝 스쳤다.

자세히 설명해주게.”

, 대통령님. 올려드린 안건의 12페이지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대통령이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쓰고는 서류를 넘기자 기다리고 있던 대령이 설명을 시작했다.

가장 유력한 방책은 억류 장소 인근에 대한 강습작전입니다. 이것은 헬기를 이용해 억류 장소 근처에 구출 병력을 투입하는 작전입니다. 신속하고, 또 가장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현지 정부나 군대와의 마찰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는 말인가?”

, 그렇습니다.”

대통령이 대령의 대답에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입에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령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디스플레이의 화면이 부드럽게 바뀌었다.

작전명은 비형랑으로 기안되었습니다. 작전에 투입될 병력은 아까 보고 드린 제132특수임무대대의 작전요원 33명입니다. 이동 수단으로는 청해진예하 제7항공여단의 수리온 헬기 5대가 대기 중이며, 이 중 네 대는 투입 병력과 인질들의 이송을 담당합니다. 남은 한 대는 다른 기체들의 고장이나 기타 불시 상황에 대비한 예비입니다. 작전 지휘는 청해진…….”

 

-2-

 

10여분 가량의 간략한 브리핑을 들은 대통령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작전 개시는 언제쯤 가능한가?”

, 대통령님. 작전은 언제든 가능합니다만, 군사적 측면에서는 지금부터 7~8시간 후가 적절하다고 판단됩니다. 일단 작전의 개요가 야간을 틈타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지 시각 상의 일몰까지는 세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거기에 현지 민간인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기 위해서는 구출부대 투입 시점에 민간인들이 잠자리에 들도록 더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이후, 대통령님께서 작전 개시 명령을 하달하시면 오작교를 거쳐 청해진예하 자치령 북부의 항공기지에서 대기 중이던 병력이 즉각 출동합니다.”

대령의 차분한 설명에 대통령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대통령의 마음은 군사 작전을 동원하는 쪽으로 기울어진 듯 했다.

……대통령님. 그렇다면 구출 작전이 가져올 현지 안보정세 변화를 최소화시켜야 합니다. 이 구출 작전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엘프들이 타국의 영역 내에서 무력행동을 벌였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 엘프들이 현지인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 지입니다.”

그건 나도 동의하네.”

참모진들을 대표해 다시 입을 연 우성용 수석이 지적하자 대통령이 약간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통령을 비롯해 이 방의 참모들이 지속적으로 받아온 브리핑에 의하면 현지의 국가들과 엘프 자치령은 지정학적으로 근거리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는 꽤나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었고, 사실 현지인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자치령의 엘프라는 존재를 직접 목격하기도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뜬금없이 기술 수준이 100여년 가량은 앞서서 잘 무장한 엘프들이 허공에서 뚝 떨어져 무력행사를 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현지인들에게 컬쳐 쇼크에 준하는 충격을 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충격을 현지 국가에게 가한다면, 현지 국가는 분명히 자치령에 대한 기존의 우호적 무시 정책을 재고하거나, 최소한 정확한 사태 파악을 위해 촉각을 곤두세울 것이 분명했다. 여러모로 한국에게는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구출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 작전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김종수 안보특보의 제안에 참모진들 사이에 잠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수정이라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특보?”

작전에 약간의 변경을 가해서 현지인으로 위장하거나 해서 구출작전을 실행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헬리콥터나 소총 같이 눈에 띄는 특이한 장비를 동원하지 않고 변장을 좀 한다면 평범한 폭력배들 간의 다툼 정도로 무마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으음, 그러니까 헬기로 도시에 직접 병력을 투입하는 대신 근처 야산 같은데 내린 다음, 변장해서 도시로 들어가자, 뭐 그런 겁니까?”

, 그렇습니다. 그리고 소음 권총이라든가 그런 장비를 이용하면 최소한의 위험만 감수하고도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통령과 안보특보의 대화에 군사 쪽으로는 문외한인 참모진들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브리핑을 맡았던 합동참모본부 대령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대통령의 국방보좌관으로서 군사 분야의 조언을 맡아온 현경완 육군 준장도 일순간 표정이 굳었다. 그런 고위 장교들의 당황한 기색을 눈치 챈 대통령이 그 쪽을 흘끔 돌아보았다.

대령, 그리고 현 장군.”

준장, 현경완!”

대령, 이준영!”

두 장교가 대통령의 부름에 복창하자 대통령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방금 전, 안보특보의 제안에 대해 군사적으로는 어떻게 판단됩니까?”

현경완 준장과 이준영 대령이 난감한 기색으로 서로를 잠시 돌아보다, 현경완 준장이 총대를 메기로 결심했는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약간이나마 섞여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특보께서 충분히 하실만한 내용의 제안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일단 군사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현지의 시가지 지형이나 기타 제반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작전에 투입된 특수부대원들이 감수할 위험이나 작전 실패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판단됩니다.”

…….”

현경완 준장의 조심스러운 조언에 대통령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옆에 앉은 김종수 특보를 돌아보았다. 김종수 특보는 약간 민망한 기색을 애써 숨기려 하였지만, 반사적으로 입가가 살짝 굳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합리적인 학자타입의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 의견이 타당성이 없다는 논박을 들은 꼴이니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우성용은 대통령이 입을 여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회의 후에 김종수 특보와 따로 대화를 통해 기분을 풀어줘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무엇보다도 정치력이 없는 현경완 준장과 이준영 대령이 주눅이 들면 그들의 상관으로서 그들의 전문적인 조언을 듣고 잘 이용해야할 우성용의 입장에서도 썩 좋을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 김종수 특보는 연배가 큰 형님뻘이고 학교 선배이기도 해서 우성용이 평소에 사석에서는 형님으로 모시기도 했으니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이윽고 대통령이 좌중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취임 후 지금까지 대통령 일을 하면서 배운 얼마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일선에 투입된 군인들에게 정치적인 목적으로 비합리적인 수칙이나 임무를 강요하면 결과물은 이도 저도 아니기 일쑤라는 겁니다. 특보의 제안도 정치적으로는 합리적이지만, 이번에는 작전 성공 자체가 더 중요한 부분이니 군에서 올린 기존 계획대로 진행하겠소.”

대통령은 지금까지 자신의 임기 6개월가량의 전반에 걸쳐 점철된 각종 비밀특수작전을 우회적으로 언급하며 쓰게 웃었다. 전 정권의 임기 말에 밀어 닥친 북한 정권의 갑작스러운 붕괴 이후 군벌화 된 각 인민군 부대들 중 친중반한파 세력과 중국의 배후 조종을 받는 게릴라들을 상대로 치열한 소탕전과 각종 비밀작전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중이었다. 대통령은 그런 비밀작전을 지시하고 직접 보고를 듣는 동안 여러 가지를 배워왔던 것이다.

, 좋아요. 그럼 그렇게, 기존 계획대로 조치해주게.”

대통령의 지시에, 내심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린 듯한 현경완 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황실 한쪽 벽의 전화기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대통령이 다시 참모진들을 돌아보았다.

그럼 허균’, 헤스마엘 장관과 실반베르크의 이어주는 자에게도 작전을 통보해야겠군. , 우 수석?”

, 대통령님. 조치하겠습니다.”

좋아요.”

우성용 안보수석의 대답을 들은 대통령이 서류철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 뒤 정장 재킷의 앞 단추를 잠갔다. 며칠 전부터 정해두었던 일정을 미뤄놓고 긴급히 회의에 들어온 지라, 대통령은 한숨 돌릴 짬도 없이 바쁘게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나가봐야했다.

, 좋소, 여러분. 이쯤 해두고, 일곱 시간 뒤에, 저녁 식사 후 다시 모입시다. 다들 수고해주시오. 만일 변동 사항이 있다면 즉시 보고하시오.”

알겠습니다, 대통령님.”

대통령을 따라 우르르 일어섰던 외교안보 분야 참모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Campaign 000. 프롤로그 소설 작업실

 

급 비밀 (경고 : 관계자 이외에는 취급을 금함.)

 

0103-1-5A

97.09.12. 승인

 

문서번호 : 11160-000001-0073 []

수 신 : ‘허균’, ‘홍길동’, 국방부장관, 합동참모의장, 국가안전기획부장

발 신 : 대한민국 대통령

생산일자 : 1997911

제 목 : 프로젝트 율도유관기관 관련 지시(대통령훈령 제73)

 

참조

. 대통령훈령 제55, 대통령, ‘90.06.01.

. 대통령령 제58, 대통령, ‘94.09.16.

. 과학기술처훈령 제217, 과학기술처장관 ‘94.10.03.

. 국방부예규 제216, 국방부, ‘94.10.07.

설명 : 참조 견우현상에 대한 정부의 조사 및 불시상황 대비의 기본지침을 제공하는 대통령훈령임. 참조 오작교수립을 지시하며, ‘율도내에서 황색노력을 준비할 것을 지시하는 대통령훈령임. 참조 는 과학연구시설 오작교의 운용 예규임. 참조 는 합동임무부대 활빈당의 운용 예규임.

 

내용

1. 대통령은 황색 1계획의 발동을 승인함.

. ‘활빈당‘97.09.12. 0000시를 기하여 황색 1계획을 발동할 것.

1. ‘활빈당의 활동은 참조 를 준수할 것.

. ‘오작교활빈당의 활동을 지원할 것.

1. ‘오작교의 활동은 참조 를 준수할 것.

 

2. 대통령은 적색 1상황에 대비할 것을 지시함.

. 합동참모의장은 지금까지 수집된 정보 및, ‘황색 1계획 중 수집한 정보를 수합하여 적색 1상황에 대한 예측과 대응방책을 수립할 것.

 

3. ‘견우율도와 관련된 모든 사항에 있어서 최고 수준의 보안을 상시 유지할 것.

 

.

 

별도의 대통령 지시사항이 있을 경우재분류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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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엘프 전사 실베스티아 로카 데 그랑베르아는 바위에 기대어 앉아 잠시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주위를 살폈다. 그녀의 탐스러운 은발 생머리는 땀과 먼지에 절어 지저분하게 목덜미에 엉겨붙어있었고 갈색의 눈동자에는 피곤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그 속에는 적절한 긴장과 함께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은 예기가 번득였다. 지친 와중에도 규칙적으로 조절하는 호흡과 영민하게 주위를 살피는 눈빛은 잘 훈련된 전사로서의 기도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부아아아아아아앙~

실베스티아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곤충들의 날갯짓 소리를 연상시키는 괴성에 흠칫 놀라 시선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쏟아져 내려와 나뭇잎과 가지들 사이를 사정없이 훑었다. 숲의 상공에는 제자리에서 날고 있는 괴물들이 보였다. 우선 넓적한 바위덩어리를 연상케 하는 몸통에 기다란 꼬리를 가진 녀석이 둘, 그리고 그것보다 작고 마치 새의 알을 연상케 하는 몸통에 마찬가지로 기다란 꼬리를 가진 녀석이 하나. 그 괴물들은 그 수에는 차이가 나지만 공통적으로 몸체에 인간들을 태우고 있었고 머리 위로 뭔가가 흡사 벌새의 날개 짓만큼 빨리 팽팽 돌고 있었는데, 실베스티아의 지식으로는 그것이 대체 어떻게 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구조였다.

기묘한 괴물들의 날개가 만들어내는 바람이 10미터 위 나뭇가지들을 사정없이 뒤흔들고, 그로 인해 머리 위의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잎사귀의 아직 한창 싱싱한 진녹색과는 대조적으로 그것은 흡사 낙엽이 지는 것과도 같았다. 바로 저 괴물들에 의해 그녀를 제외한 정찰조 동료들이 평원에서 뿔뿔이 흩어져버린 것이다.

실베스티아는 품속에 잘 갈무리해둔 보고서를 떠올렸다. 어젯밤에 휴대용 비가시성 마법조명오브 아래에서 에텔라 메사 자치령에서는 보기 힘든 양피지에 선명하면서도 빨리 마르기로 유명한 펜노스 제 잉크를 써서 잘 정서한 이 문서는 그녀의 순찰조 소속 초보전사 엘레노어 라 데 그랑베르아가 작성한 것이었다.

어젯밤, 야영지에서 이 문서를 작성하고 품에 갈무리 한 직후, 순찰조원들이 인간들의 기지와의 사이에 두고 몸을 숨기고 있던 언덕 너머에서 갑자기 괴물들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 특유의 날개소리도 들리지 않아 순찰조원들이 안심하며 쉬려는 타이밍이었기에 당연히 조원들은 적잖게 놀랐다. 거기에 더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순찰조원들의 눈앞에 나타난 괴물들은 눈이 멀어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 될 정도로 강력한 지향성 광원을 갑자기 쏘아 조원들을 일순간이나마 마비시켰다. 그들은 처음부터 실베스티아와 동료들의 존재를 감지하고 차분히 포획을 준비했던 것이었다.

그 다음은 조원들 모두가 패닉에 사로잡혀 냉철한 임무분배와 토의도 없이 시작한 맹목적인 도주, 그리고 인간들이 냉철하게 근처에 병력을 배치시켜 놓고 시작한 하루 동안의 추격전이었다. 그나마 엘프들이 평범한 훈련받은인간들의 수준보다 더 우수한 신체 능력을 가진 덕분에 우격다짐으로나마 포위망을 뚫고 나왔던 것이지, 그들이 인간전사들이었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전부 잡히고 말았을 것이었다.

지금 엘레노어는 저들, “인간들에게서 벗어나 도망치는 동안 숲 어디에서 사라졌는지, 아니면 잡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6명의 실베스티아 순찰조원 전원이 마찬가지 신세였다. 애초에 파견될 당시 부여 받았던 임무, 샤페르 평원에서 보고된 인간들의 실체를 그들에게 들키지 않게 확인, 조사하고 지속적으로 접촉하며 관측을 계속하는 임무는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보고서와 함께 짧은 시간이나마 그들에 대해 관측한 사실에 대해 자치령 원로원에 보고하는 것.

실베스티아의 순찰조가 자치령 원로원의 지시에 따라 자치령 최남단, 에텔라 이아누 숲으로 파견된 것은 보름 전 일이었다. 대륙 서남부의 반도에 위치한 에텔라 메사 자치령의 특성상 인간들과의 접촉은 자치령 영토 북부에서 대개 이루어지는 성격의 것이었고, 더더군다나 자치령 최남단의 에텔라 이아누 숲은 자치령 북부의 세스타 강이라는 자연지물과 세스타 강 이남, 에텔라 이아누 이북의 숲들로 인하여 인간과 거의 완벽할 정도로 분리되어왔는데, 뜬금없이 바로 그 에텔라 이아누 숲의 큰 마을 촌장이 인간의 출현을 자치령 원로원에 보고한 것이었다. 자치령 원로들이 기함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고대 제국 붕괴와 엘프 왕국 딜로쿨 로템의 멸망 이후 지금까지 인간과 엘프의 관계는 대개 우호적이라고 평가하기는 힘든 상태였다. 자신들이 보기에 이상적인 미적기준을 가진 엘프라는 종족에 대한 인간의 탐욕은 실로 무서울 정도였는데, 만일 엘프들이 모르는 통로를 인간들이 확보하게 된다면 자치령이 건설된 이래 근 500년간 잠잠하던 엘프에 대한 대규모 인신매매가 재개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 500년이라고 하면 인간들 입장에서는 수십 세대가 지날 엄청난 기간이겠으나, 인간에 비해 수명이 매우 긴 엘프들에게는 그다지 멀게 느껴지는 세월도 아니었다. 따라서 지금 엘븐 레인저들이 체감하는 위험수준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당연히 이는 엘븐 레인저를 보유하고 있으되, 실질적으로 자치령 내로 침입하는 인신매매단으로부터 엘프들을 보호할 책임은 실질적으로 각 숲의 자경대와 더불어 명목상의 종주국인 소로스 왕국의 아량에 의존하던 자치령 원로원으로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세스타 강 대안(對岸)의 소로스 왕국이 건국된 대륙력 1040년대부터 근 5백여 년 간 소로스 측이 경찰 및 지방군 조직을 동원해 인신매매조직을 단속해 준 덕분에 에텔라 메사 자치령에 대한 인신매매조직의 준동은 상당히 감소했지만, 그 이전에 통일제국의 붕괴와 동시에 시작된 거의 1천 년에 달하는 대륙 내의 종족적 수난기는 엘프들에게 상당한 트라우마를 새겨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노예제 자체를 금지한 소로스 왕국이 아니라 킷나하 왕국이나 로젠베르 제국 등의 경우, 소규모 엘프 공동체(이를테면 숲.)에 대한 인신매매조직의 습격이 아직도 빈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소로스 왕국의 아량에 의존해서나마 이 문제에서 어느 정도 안심을 할 수 있었던 에텔라 메사 자치령 입장에서, 인간과 얼굴을 맞대고 사는 북부도 아니고 뜬금없이 최남단에서 인간 집단의 출현을 보고해오자 원로원이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경계지역 수비가 그리 엄중하지 못하여 몇 명 정도의 인간들이 자치령에 들락거리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었고, 원로원도 오히려 선량한 인간 탐험가들에 대해선 자치령 입경을 허용하기까지 하는 상황이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소 수백 명 단위의 인간들이 뜬금없이 자치령 남부에 나타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인원이라면 그들이 남부에 도착한 루트가 분명 존재할 것이었고, 그 루트를 통해 보급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치령 북부의 경계 수준이 인간들의 기준으로는 느슨하다 하더라도 경계선에 큰 구멍이 생긴 정도까지 내몰리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는 분명 자치령 남부, 절벽지대의 어딘가에 제한적인 수준이나마 항구와 베이스캠프가 설치되었다는 의미일까? 실베스티아는 잠시 그 것이 의미하는 사실에 짧게 전율했다.

 

-2-

 

빛기둥은 잠시 그녀의 머리 위를 이리저리 훑다가 이윽고 방향을 바꿔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무래도 나뭇가지와 나뭇잎의 물결 아래에, 그것도 야음을 틈타 몸을 숨기고 있던 실베스티아를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제야 베테랑 전사답지 않게 긴장했던 실베스티아도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갑자기 목이 탔다.

바스락

막 허리춤의 목제 수통에 손을 가져가려는 순간, 그녀의 예민한 청각에 바위 너머 뒤쪽에서 누군가가 수풀을 헤치며 접근해오는 기색이 포착되었다. 조심스럽게 풀숲을 헤치며 다가오는 발소리는 하나 둘이 아니었다. 소음이 주변 지형지물에 의해 왜곡되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소리의 크기로 미루어 보아 추적자가 최소한 100미터 이내까지 접근한 것 같다. 실베스티아가 슬쩍 고개를 내밀어보니, 과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들고 있는 게 분명한, 강력한 지향성 광원들이 나무와 바위 사이를 샅샅이 훑으면서 다가온다. 이제 움직일 시간이다. 하지만 어떻게? 조용히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발걸음으로 수풀 속으로 스며들 것인가? 아니면 숲 속을 내달리는 사슴처럼 재빠르게 저들의 눈앞에서 사라질까?

고민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방금 전에 머리 위에 나타난 괴물들에는 분명 인간들이 타고 있었다. 어떻게 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은 시야가 제한되는 야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근처에 차단 망을 설치하기 전에 잽싸게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결단을 내린 실베스티아는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허리춤에서 풀어 바로 앞의 넓적한 돌 위에 올려두었던 피스톨 두 자루와 장검 한 자루를 다시 허리에 꽂은 뒤 옆에 기대어 세워두었던 킷나하제 1451식 란사르 라이플을 양손으로 쥐고 등을 기대고 있던 바위를 벗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실베스티아가 개인적으로 소로스 왕국과의 관용무역을 통해 구하여 애지중지하고 있는 물건들이었다.

파바박!

막상 달리기 시작하자. 자신이 풀숲을 마구 헤치며 달리는 소음이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려왔다. 정신없이 달리면서도 이것이 과연 잘 판단한 것일까 속으로 계속해서 의구심이 들었다. 냅다 내달리는 대신 조용히 숲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어 숨었더라면 어쩌면 발각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일단 행동을 시작한 후에는 그런 고민조차도 잊어버려야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인간들에게서 무사히 달아나는 것이었다.

“2시 방향 확인!”

확인!”

그녀의 발자국 소리에 뒤이어, 수풀을 훑던 빛줄기들이 그녀가 머물던 자리를 따라 사방으로 춤을 췄다. 이윽고 그녀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했는지 등 뒤에서 최소한 그녀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언어의 고함이 한차례 교차하더니 그 뒤로는 별다른 말소리도 없이 그녀의 뒤를 쫒아 수풀을 밟는 발소리들만이 들려왔다. 저들이 단순히 어중이떠중이, 범죄자들을 모아놓은 인신매매집단이 아니라 적어도 준 국가조직 수준의 단체가 잘 훈련한 정예병력이라는 증거다.

실베스티아는 긴장을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근 20년 간 근무하면서 소로스 왕국과의 경계선에서 체포해왔던 어중이떠중이 범죄 집단과는 차원이 다른 집단을 처음 마주한 것이었다. 흔히들 생각하는 개개인의 강력한 전투력은 사실 집단 차원에서는 그리 큰 요소가 아니다. 오히려 통일성 있고 잘 조직된 지휘체계와 조직력이 훨씬 두려운 상대였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숲길을 달리자니 허리에 차고 있던 피스톨과 단검들도 걸리적거렸고, 무엇보다 강선라이플도 기다란 것이 상당히 거추장스러웠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것들을 버릴 생각 대신 소중히 끌어안으며 쓰러진 나무를 뛰어넘고, 수풀 사이를 정신없이 내달렸다.

부스럭!

정신없이 달리던 실베스티아의 진로 전면, 개울 너머 수풀 뒤에서 무언가의 머리가 불쑥 드러났다. 마침 구름 사이에 가렸던 하현달이 잠시 고개를 내밀어 지면을 비추자, 상대방의 모습이 좀 더 명확히 보였다.

상대는 검은색의 천으로 만들어진 이상한 모자와 함께 옅은 녹색 바탕에 짙은 녹색과 검은색, 흙색 등이 지저분하게 칠해진 너저분한 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다 조금 더 자세히 보니 얼굴에도 옷과 마찬가지 색상의 염료들로 얼룩덜룩 칠해놓은 꼴이 꽤나 우스웠다. 모자 아래, 날카롭게 빛나는 두 눈빛과 실베스티아의 시선이 한 순간 마주쳤다.

표적 확인!”

실베스티아는 상대의 고함에 별 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잠시 멈춰서 손에 들고 있던 라이플을 견착 조준했다. 발을 디딘 지면의 흙이 약간 쓸려나가는 느낌이 들었으나 조준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실베스티아의 1451식 란사르 라이플은 최신 기술인 충격식 뇌관 방식을 이용해 격발되는 것으로, 그녀가 방아쇠를 당기자 공이치기가 하는 소리와 함께 황동제 뇌관을 뭉개고, 그 충격으로 뇌관 안의 충격화약이 발화, 약실 안의 주 장약이 폭발하며 이윽고 장전해 두었던 청동제 미니에 탄이 에너지를 받아 튀어나가는 과정이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콰앙!

우왁!”

그러나 표적은 실베스티아가 자신을 겨누는 순간, 민첩하게 옆으로 몸을 날렸기에 미니에 탄에 맞지 않았다. 물론 실베스티아도 그 회피 동작을 염두에 두고 예측사격을 했으나 표적이 원체 빠르게 몸을 날려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간 모양이었다. 그러나 실베스티아는 이미 신경도 쓰지 않고, 포위망에서 헐거운 방향으로 본능적으로 방향을 바꿔 내달렸다. 바위를 넘어 타고, 지난 여름의 폭풍에 쓰러진 채로 썩어가는 나무기둥을 뛰어넘으면서.

이쯤 되면 근처 마을의 전사들이라도 나와 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녀는 천하태평으로 늘어져 있을 근처 마을의 자경대원들을 속으로 비난하며 정신없이 달렸다. 사실 이 근처는 마을 자경대원들의 순찰 범위에는 포함되지 않을 만큼 외진 곳이었지만, 워낙 다급한 나머지 그런 것에는 생각조차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순간, 널따란 공터가 눈앞에 펼쳐지고, 나뭇가지와 잎사귀에 가렸던 밤하늘이 드디어 올려다보였다. 실구름이 하현달의 빛을 가리고, 대신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들로 이루어진 신들의 강이 눈이 부시게 펼쳐졌다.

젠장!”

흥분 때문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터 한 가운데까지 달려 나와서야 아차 싶었던 실베스티아가 짧게 욕설을 뇌까렸다. 공터를 둘러싼 모든 나무 사이마다 어느 순간부터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등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도 자신을 이곳으로 몰아왔던 그림자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두다다다다다다~

불현 듯 북동쪽, 300걸음 쯤 떨어진 언덕 뒤에서 나타난 괴물들이 갑자기 좌우로 갈라지더니 눈부신 빛의 기둥을 그녀를 향해 쏘았다. 아까 전의 움직임은 그들이 멀리 떠난 것이 아니라 그녀를 함정에 몰기 위해 잠시 숨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나무 사이사이에 서있던 그림자들도 일제히 불빛을 켜 그녀를 겨눴다. 땅바닥에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빈틈이 없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불빛에 눈이 부신 실베스티아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괴물들의 날갯짓이 일으키는 엄청난 바람에 먼지가 날려 숨이 막혀온다. 저 괴물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공터 주변에는 최소한 수십 명의 남자들이 서있다. 총으로도, 격투로도 그들을 피해 달아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보기 좋게 함정으로 걸어 들어 온 꼴이네. 한심해.’

실베스티아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인간들의 조직력과 기동력, 상황판단에도 상당히 놀랐다. 그녀는 천성이 숲의 종족이라고 불리는 엘프의 일원답게, 최소한 숲에서는 인간들이 쉽사리 한 곳으로 몰아넣거나 따라잡기 힘든, 경우에 따라서는 찾아내기조차 힘든 몸놀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저들은 매우 능숙하게 탄탄한 포위망을 형성하고 차분히 그녀를 사냥 장소로 몰아넣은 것에 성공한 것이다. 여러모로, 그녀가 상대해오던 북부의 범죄 집단들과는 달랐다. 이 정도로 많은 수의 인원을 잘 훈련시키고, 거기다 척 보기에도 다루기 힘들어 보이는 괴물들을 능숙히 이용해 기동하는 모습은 이자들이 결코 평범한 범죄 집단은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실베스티아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빛에 눈이 부신 와중에도 빛을 등지고 그녀를 향해 라이플 비스무리 한 것을 겨눈 채로 천천히 다가오는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선택해야 할 때였다. 그녀는 아직 손에 쥔 상태로 축 늘어트리고 있던 1451식 란사르 라이플을 힘없이 땅에 떨어트렸다. 뒤이어 허리 벨트의 양쪽에 찔러 넣어뒀던 두 자루의 피스톨도 천천히 꺼내 차례대로 땅에 던지고 두 손을 깍지 껴 뒤통수에 올린 채로 서서히 무릎을 꿇어앉았다. 이제 남은 것은 저들이 최대한 신사적으로 그녀를 대해주기만을 기대하는 것 뿐.

그녀의 등 뒤로 조심스럽게 다가선 남자가 두 손을 잡아 수갑으로 손을 구속하는 것을 자각하며, 실베스티아는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그녀는 인간들에게 잡힌 엘프 여성이 정조를 잃지 않고 풀려났다는 사례를 들은 기억이 거의 없었다.

 

-3-

 

, . 생기기는 낭창낭창하니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저런 아가씨가 만 하루를 숲속을 뛰어다니다니, 체력 한 번 기가 막히네.”

중령은 수갑과 포승줄로 구속된 상태로 전투원 세 명의 감시 하에 놓여 공터에 앉아있는 포획물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지막 목표물을 함정에 몰아넣었다는 보고를 듣자, 직접 참관 차 헬기편으로 급히 이동했는데, 그 사이에 부하들이 신변을 구속한 것이다.

강릉 때 윗동네 애들보다도 훨씬 몸이 가벼운 것 같습니다.”

중령은 옆에 서있던 대대 작전장교의 말에 피식 웃었다. 지금이야 피식 웃으며 넘겼지만, 당시 대간첩작전의 일선에서 이들이 느꼈던 공포와 좌절감, 긴장감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1년 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국군이 대대적으로 각종 대침투작전 전술과 경계근무체계를 일신한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었으니까.

최소한 얘들은 원거리에서 M16 단발사로 우리를 농락하진 않았지.”

떡이 되도록 얻어맞은 애들은 있습니다.”

……, 그래도 크게 다친 애들은 없잖아.”

그의 부하들은 어제 밤부터 능숙한 솜씨로 탐사기지의 근처에 어물거리던 포획물들을 하나하나 몰아넣어 체포했으나 다들 그 엄청난 체력과 험지주파능력, 그리고 두 번은 그 근접 격투 실력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다들 몇 년 전, 강릉에 침투했던 북한 공작원들보다도 더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문명 간의 첫 교류에 걸맞게도 그들이 이쪽이 동원한 현대 군사장비의 성능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기에 손쉽게 잡을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랄까.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중령은 후배 장교의 물음에 잠시 침묵했다. 그 질문은 실로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어서 함부로 대답하기가 꺼림칙했다.

이곳이 다른 세계라는 사실쯤은 모두들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완전무장한 채로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게이트를 통과해 생판 처음 보는 곳으로 뛰어들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리라. 젊은 병사들 중에는 분명히 몇 년 전에 개봉한 스타게이트라는 미국 SF 영화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었다.

, 별 거 있겠나. 높으신 양반들 생각에는 식민지 세우고 그러려는 거겠지.”

중령이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으나, 그로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미지의 전염병이나 갑작스러운 게이트 봉쇄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부터 기밀유지, 보안 같은 사안에도 생각이 미쳤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왜정 시절의 일본인들의 만행도 떠올랐다. 어쩌면 그와 부하들도 일본군처럼 만행의 선봉에 설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시무룩해지기도 했다. 비록 17년 전, 그가 육사 생도로서 군문에 처음 들어섰을 때에도 쿠데타가 터지기는 했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군인은 본디 민간인을 학살하기 위해 무장하고 훈련하는 조직은 아니었다.

<대통령 지시로 익일 0000시 부로 황색 1발령.>

중령은 10일 전 받았던 명령문의 첫 문장을 곱씹었다. 사전에 숙지한 약어 목록에 의하면 황색 1는 이쪽에 먼저 존재하고 있던 선주 문명과의 우호적인 접촉 노력을 지칭한다. 하지만 그 지시는 어떻게 이행할지 구체적이고 명확한 지시를 담고 있지는 않았다. 일선에서 대원들을 이끌고 지휘해야 할 중령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중령을 비롯한 장교들은 연구부서의 안경잡이 박사들로부터 이쪽 세계에 대해 차원 왜곡점, 그러니까 문 너머에서 관측 가능한 모든 사항에 대해 지속적으로 브리핑을 받았지만 사실 그것은 거의 아무 내용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작해야 이쪽 세계가 지구와 유사한 탄소기반 생태계에 대기 비율도 거의 유사하여 별도의 보조 장비 없이도 활동이 가능하다는 점, 행성 지표에 작용하는 중력은 약 0.997 지구중력으로, 도보나 정밀장비가 아닌 장비는 즉각 활용이 가능하다는 점, 자전주기는 23시간 57, 공전주기는 365.2560일이라는 것 등, 군인 입장에서는 별로 필요하지 않은 과학적 수치들뿐이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중령과 부하들이 호위하는 탐사대가 이곳으로 직접 건너와 알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고작해야 동북아에 국한된 지역국가인 한국은 어떠한 인프라도 없는 곳에 당장 쓸 만한 활동거점과 보급로를 건설하는 노하우가 미비했고 그 곳이 인종, 문화, 문명수준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는 곳, 예를 들어 지구와 다른 행성이라면 두말 할 것도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은 몸으로 부딪히며 이뤄야했다. 지금도 게이트가 열린 곳, 코드명 녹둔도에는 각종 건설용 중장비로 기지를 건설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중령은 다시 공터 한 복판에 앉아있는 포획물을 돌아보았다. 부사관들에게서 대강 신체 수색을 받은 다음, 흙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있었다. 자기 신세에 대해서 자포자기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만 바라보고 있다. 하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전장에서 여자는 특히나 그 존엄성을 보호받지 못하고 수난을 당하기 일쑤였다. 군형법에서는 전지강간을 사형으로 다스리도록 규정하고 있다지만, 그 법조문이 전쟁터에 홀로 떨어진 여자의 안전을 원천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령이 그런 범죄 행위를 용인하지도, 이들 특전사 요원들이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을 것이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올곧게 발달한 얼마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사회 개개인의 평균적인 도덕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상부에서 떨어진 작전 지시와 행동 지침도 그런 범죄를 금지 할 것을 명확히 지시했고.

그런저런 씁쓸한 생각을 잠시 접어둔 중령이 씩 웃으며 등 뒤의 작전장교를 돌아보았다.

어이, 작전. 가보자구. 공비들보다 더 무시무시한 아가씨가 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궁금하지 않나?”

그렇게 악랄하게 웃으시면 꼭 독립 운동하던 처자를 붙잡은 일본군 장교 같습니다.”

……우리가 저 아가씨 데려다가, 뭐 일본 놈들처럼 수통이나 춘천통합병원에서 배라도 갈라본데? 엑스레이나 몇 방 찍고 말겠지.”

중령은 이 절친한 후배 녀석의 이번 농담이 별로 맘에 들지 않는지, 쯧하고 혀를 찬 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근처 공역에서 대기 중이던 UH-60P 블랙호크 헬리콥터가 이송을 위해 전방 탐조등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공터로 내려서고 있었다. 로터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 폭풍이 눈을 쉽사리 뜰 수 없을 정도로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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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 비밀 (경고 : 관계자 이외에는 취급을 금함.)

 

0206-1-8A

09.05.26. 승인

 

문서번호 : 11160-000001-0250 []

수 신 : ‘허균’, ‘홍길동’, ‘장보고’, ‘산신령

발 신 : 대한민국 대통령

생산일자 : 2009526

제 목 : ‘율도관련 보안등급 조정 및 군사, 정치, 경제에 관한 신규행동지침 지시(대통령훈령 제250)

 

참조

. 대통령훈령 제55, 대통령, ‘90.06.01.

. 대통령훈령 제58, 대통령, ‘94.09.16.

. 과학기술처훈령 제217, 과학기술처장관 ‘94.10.03.

. 국방부예규 제216, 국방부, ‘94.10.07.

. 대통령훈령 제73, 대통령, ‘97.09.11.

. 33840-07-4041, 합동참모본부, ‘99.01.25.

. 대통령훈령 제114, 대통령, ‘04.01.24.

. 대통령훈령 제214, 대통령, ‘08.04.16.

. 33841-09-0104, 합동참모본부, ‘09.04.03.

. 국방부훈령 제1057, 국방부, ‘09.05.25.

설명 : 참조 견우현상에 대한 정부의 조사 및 불시상황 대비의 기본지침을 제공하는 대통령훈령임. 참조 오작교수립을 지시하며, ‘율도내에서 황색노력을 준비할 것을 지시하는 대통령훈령임. 참조 는 과학연구시설 오작교의 운용 예규임. 참조 는 합동임무부대 활빈당의 운용 예규임. 참조 는 참조 를 수정, 보충하며 황색 1노력을 발동할 것을 지시하는 대통령훈령임. 참조 는 참조 의 지시에 따라 작성한 오작교율도내 군사전략 및 장기군사전략임. 참조 황색노력에 대한 지침을 수정 및 보충하는 대통령훈령임. 참조 황색노력의 제3단계 이행 연구를 지시하는 대통령훈령임. 참조 는 참조 에 의거하여 작성하는 율도내의 안보정세 분석 및 연구의 최신판임. 참조 는 통합방위법 및 동법시행령, 대통령훈령 제28호에 따라 국가중요시설의 지정 및 방호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는 국방부훈령임.

 

내용

1. 대통령은 국방부장관 및 국정원장에게 참조 에 의거하여 오작교를 국가중요시설 등급으로 지정할 것을 지시함.

. ‘활빈당은 유관기관과 협조하여 참조 및 관련 법령에서 규정한 바와 같은 보안태세를 확립할 것.

. ‘홍길동은 위에서 규정한 바의 활동을 지휘, 감독할 것.

2. 대통령은 청해진을 특정경비지역사령부로 지정할 것을 지시함.

. ‘장보고는 참조 를 참고, 특정경비지역사령관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것.

. ‘청해진의 작전 및 경비 활동은 관계 법령 및 참조 에 의거할 것.

3. 대통령은 황색 3노력의 이행을 승인함.

. ‘허균의 판단에 따라 공사 범위장기도로 확장할 것.

. ‘산신령허균황색 3노력을 수행함에 있어 적절한 조언을 제공할 것.

. ‘산신령나무꾼에 있어서 황색 1노력을 계속할 것.

. ‘직녀성은 유관기관과의 협조 하에 황색 3노력을 지원할 것.

4. 대통령은 적색 1상황에 대한 대비를 지시함.

. ‘장보고청해진을 지휘해 적색 1상황에 대비한 작전계획을 수립할 것.

. ‘청해진은 작전계획에 따른 인적, 물적 자원 소요를 산정하여 대비할 것.

. ‘장보고청해진에 주어진 자산을 적절히 이용하여 장기도및 기타 율도내의 군사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 분석할 것.

. ‘허균직녀성을 지휘하여 적색 1상황에 대비한 계획을 수립, 연습할 것.

. ‘허균의 통합지휘 하에 나무꾼에 대한 황색 1노력을 훼손하지 않는 수준에서 상기 계획들을 통합하여 연습할 것.

5. 별도의 지시 사항이 하달되기 전까지 공사대상은 소나무에 한정함.

6. 최고수준의 보안 상태를 상시 유지할 것.

 

.

 

별도의 대통령 지시사항이 있을 경우재분류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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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C 리어가드에 어서 오세요! - 001. 소설 작업실

0.

 

위협!”

나는 옆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파지하고 있던 MK18 카빈을 어깨 쪽으로 당겨살짝 내려가 있던 프론트 사이트와 리어 사이트를 일치시켰다그리고는 약 20미터 정도 떨어진 전방의 흰색 현대 포터 트럭 뒤에서 뛰쳐나온 그림자를 향해 방아쇠를 빠르게 여러 번 당겼다단발 연속사격의 반동을 받아내는 훈련은 지겹게도 받았기에침착히 총구의 반동을 억제할 수 있었다더군다나 내가 지금 취하고 있는소화호스를 다루듯 왼쪽 손을 쭉 뻗어 총구 가까이에서 핸드가드를 잡는 아틀란틱 스탠스는 카빈 소총이나 돌격 소총 등의 속사 반동을 제어하기에도 유리하다.

타탕!

그림자는 영화에서 흔히 보듯 격렬한 동작으로 뒤를 향해 나가떨어지지도자리에서 한 바퀴 뱅글 돌며 요란한 동작으로 쓰러지지도 않았다그저 질량 중심에 여러 발의 5.56mm 소총탄을 맞자갑자기 온 몸을 지탱하던 힘이 사라져버린 듯 그 자리에 무릎부터 꿇더니 상체까지 쓰러진 뒤 결국 움직임을 멈췄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일이 그런 것을 신경 쓰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그녀가 누누이 말했듯방심은 쓸 데 없는 사치일 뿐이었다아니그런 것을 떠올릴 틈도 없다그저 첫 실전에 닥쳐 절제 없이 뇌 속에서 마구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으로 인한 흥분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나는 첫 실전을첫 살인을 경험한 순간에도 그저 담담하게 훈련받은 대로 총구를 다시 아래로 내리고 앞에 확보된 엄폐물을 향해 일정한 속도로 아스팔트 도로 위를 걸었다.

잘 하고 있어이대로 빠져나가자.”

내 왼쪽, 8시 방향에서 2~3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시연 누나의 총구 끝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을 걸어왔다나도 연신 총구를 담당한 경계구역 내에서 움직이며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아드레날린에 정신이 핑핑 돌고숨도 목 끝까지 차올라왔다이런 스스로가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는데 그녀는 오죽할까 싶어 곁눈질로 흘끔 돌아보자시연 누나가 511 택티컬 온라인 샵에서 며칠 전에 구매한 라이돈 선글라스의 검은색 렌즈 너머로 눈을 흘겼다.

전투 중에는 헛생각하지 마네 동료가 다쳐.”

준엄한 스승과도 같은 질책에 찔끔 한 나는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지난 몇 달간 느낀 것이지만시연 누나의 가르침은 항상 정확했다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찰나의 방심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시연 누나의 주의 분산을 유도했고단 두 명의 전투원이 서로에 의존해 위험구역을 빠져나가는 지금의 상황에서찰나의 주의 분산은 치명적이었다.

……두 시 방향상가 건물 옥상! RPG!”

시연 누나가 비명과도 같은 경고를 외침과 동시에 총구를 치켜들더니 태준물산이라고 적힌 간판이 붙은 옥상을 향해 단발 연속 사격을 가했다원래라면 내가 경계해야 했을 구역 안의 긴급표적이었다그러나 나는 본능적으로 시연 누나의 총구를 따라 시선을 돌린 뒤 그대로 시연 누나를 향해 달려들어 그녀를 방탄조끼채로 와락 껴안으며 몸을 날렸다.

슈아아아악!

뒤이어, RPG-7의 느릿한 발사음이 들리더니,

콰아앙!

혼을 쏙 빼놓을 만큼 큰 폭음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엄청난 폭음과 충격파그리고 거기에 딸려 날아온 아스팔트 조각이 내 등과옵스기어 전술방탄 헬멧에 쏟아졌다뒤이어 마치 명치를 햄머로 얻어맞은 듯 숨이 일시적으로 턱 막히더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한성아!”

나를 부르는 시연 누나의 목소리가 마치 멀리수면 밖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흩어지고나는 온몸이 물 아래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에 팔을 흐느적거렸다.

타탕!

그런 나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이를 악물며 다시 총을 들어 어딘가를 향해 쏘아대는 시연 누나의 얼굴도 점차 물결 너머에서 보이는 것처럼 흐릿해졌다.

이대로 죽는 건가?

 

1.

 

나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다키는 180센티미터 정도로 큰 편이지만그렇다고 딱히 신체가 강건하지도 않고성적도 중상성격도 무난함덕분에 교우 관계도 양호이쯤 되면 야간자율학습이라던가 무지막지한 학습량이라던가 하는 일반적인’ 문제를 제외하고는 내 학교생활에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딱 한 가지를 빼놓으면.

 

……오케이오늘도 수금 완료했고.”

나는 내 앞에서 건들거리며 천 원짜리 여러 장을 세어본 뒤 지갑에 꽂아 넣는 녀석의 발끝만 노려보며 속으로 이를 부드득 갈았다대한민국 고등학생의 제식 장비라고 할 수 있을 삼선 슬리퍼그 녀석의 옆에는 역시 다른 녀석들 또한 삼선 슬리퍼 일색이다고개를 살짝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벽돌로 포장된 바닥에 운동장의 모래가 심심찮게 떨어져있는 학교 본관 뒤편의 사각지대의 광경이 펼쳐진다.

그렇다나는 지금 삥을 뜯기고 있는 것이다소위 말하는 일진이라는 쓰레기들에게.

내가 딱히 뭔가 잘못한 것은 아니다뭔가 얕잡힌 것도 아니다그저 운이운이 나빴을 뿐이었다아버지의 전근으로 인해 3개월 전갑자기 경기도의 모 베드타운의 똥통 공립 고등학교에 운 없이 떨어졌다는 것도.

표정이 왜 그러냐꼽냐?”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가슴이 뜨끔한다일진 녀석의 옆에서 흔히 말하는 꼽사리를 끼는 따까리가 오히려 더 무섭다덩치도 조그만 놈이일진 녀석의 비위를 잘 맞춰서 따라다니는 주제에 자기가 나를 제압이라도 한 양 까불거린다단 둘이 있으면 별 것도 아닌 놈이.

이 새끼 이거 존나 불만인가보네?”

그런데 그 따까리가 내 표정에서 불만을 읽었는지 기세가 양양해 따지고 들어온다다른 일진 놈들은 그냥 재미있는 연극이라도 보는 듯 끼어들 생각이 없어 보인다하기야 그렇겠지비록 따까리라도 자기 그룹에 낀 놈을 면박을 주는 건 싫겠지.

이놈이 때리면 맞아줄까아니면 때려눕힐까하지만 아무래도 그냥 때리는 대로 맞아주는 쪽이 나중에 두고 보면 더 나을 것이다최소한 다른 녀석들이 몰려와 집단 구타는 하지 않을 테니.

나는 어느새 굴욕과 굴종을 속으로 삭이는 것에 익숙해져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 순간멀리서 망을 보고 있던 다른 따까리가 뛰어왔다.

황비홍 온다황비홍!”

황비홍이라면 항상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니는 체육 담당 학생주임이렸다학생인권조례니 뭐니 해도 교사 앞에서 다른 놈 삥을 뜯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은 꺼림칙한지일진 녀석들의 태도가 급변했다.

가자.”

드디어 이 녀석들이 나를 놓아줄 마음이 들었나보다그런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짝짝

아까 그 예의 따까리 녀석이 양 손으로 내 볼을 두어 번 치더니 내 볼을 잡고 올려다본다.

표정 관리 좀 하자표정 관리 좀?”

…….

 

2.

 

오늘은 야간자율학습이 없는 날이었다나는 앞장서서 부모님에게 먼저 보습학원 등록을 요청했고부모님은 그에 만족해 학교에 제출할 야간자율학습 조퇴 요청서에 군말 없이 서명해주셨다나는 한시라도 빨리 학교를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야간자율학습 시간에야 교사들이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며 학습태도를 감시하니 괴롭힘이 좀 덜하지만아무리 그래도 나에게 학교는 지긋지긋한 곳이었다.

나는 내심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방을 고쳐 메고먼지가 풀풀 풍기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으로 향했다학교 담벼락 너머로 어느덧 석양이 뉘엿뉘엿 지는 가운데 펼쳐지는 아파트촌의 광경은참 쓸쓸해 보였다도로에 심심찮게 승용차가 다니기 시작했음에도 그랬다.

만사에 재미가 없었다다행히도 자살 충동은 아직 들지 않았지만슬슬 놈들에게 뜯기는 용돈도 부담이 될 만큼 불어나고 있었다여기 와서 처음 사귄말이라도 나누는 친구들은 그 녀석들의 괴롭힘 앞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양 시선을 돌리기에 급급했다나는 교복이라는 죄수복 안에 갇혀버린 느낌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일터였다그러나 나는 내심그 뒤처리가 잘 되지 않으면 어떡할지를 걱정했다녀석들이 훈방되어 학교로 돌아오면나는 그 배 이상으로 괴롭힘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그것의 현실적인 가능성이 얼마나 되던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일이 그렇게 진행되곤 했다끔찍했다.

태권도나 복싱 같은 무술이 도움이 될까 생각해봐도여러 명을 동시에 상대로 이겨낼 수 있는 수준으로 수련을 하는 것은 단기간 내에 이뤄지지 못할 목표가 분명했다그렇다면 굳이 힘들게 그런데 내 노력을 쏟아 부을 필요도 없지그냥 외부로부터의 스트레스에 최대한 무감각해진 상태로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시 한숨을 쉬며 눈앞의 자갈을 툭 차서 텅 빈 인도 저편을 향해 날리는데갑자기 무언가 바뀐 광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파트촌 뒤낡은 사무실과 상점연립주택이 모인 단독주택 지역 쪽에 웬 큰 택배회사 트럭이 멈춰서 있었다얼핏 보니, 1톤은 넘어보이는 택배 트럭에 한가득 찬 기자재를 용역업체 직원들로 보이는 아저씨들이 바쁘게 옮겨 1층 사무실로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그러고보니 저 사무실,한 달 전에 웬 건강식품 영업국이 망한 뒤로 비어있는 상태였지그 때문인지 건강식품의 배경색 격인 밝은 녹색의 테이프가 사무실 전면의 유리창을 아직도 뒤덮고 있는 상태였다이제야 저 테이프들 떼어내기 시작하는군.

나는 무심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그 앞을 스쳐가며 새로 들어온 상점의 출입문 위 간판을 확인했다그새 간판까지 맞춰놨는지 빨리도 달아 놨다 싶었다.

 

리어가드 시큐리티 솔루션

 

웬 IT 보안업체인가 싶었는데그 옆에 조그맣게 적힌 상세 업무를 보니 살짝 기가 막힌다.


사업장 보안경호경비원 훈련호신술 수련

 

이거…….”

이거 설마경호업체인가하지만 이런 경호업체에 으레 따라붙기 마련인 직원 격의 떡대 있는 형님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데.

내가 그렇게 의문을 가질 때 쯤택배 트럭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각지대에서 웬 늘씬한 미녀가 걸어 나왔다선글라스에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그리고 볼륨감이 넘치는 흰색 탱크탑에 청바지라……선글라스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대략 20대 중반쯤으로 보인다그것도 대단한 미녀의 얼굴이었다.

…….”

그녀도 나와 시선이 마주쳤는지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떼어 품속으로 집어넣다 말고 내 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것이 나와 그녀의 첫 만남이었다. PMC 리어가드 시큐리티 솔루션의 사장인 진시연 누나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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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총덕 라노벨...이라는 느낌으로 가볍게 구상해본 소설입니다. 역시나 메가로드가 될 예정인듯...

참고로 진시연이라는 등장인물은 CIA SAD(Special Activities Division, 특수공작국)에서 심심찮게 블랙옵스를 뛰던 무시무시한 누님입죠.

시연 누님 : 나 PMC 한다... 항복도 받아... 항복만 빼고, 모조리 씹어먹어줄게.


[풀메탈패닉X블랙라군] 로아나프라와 파사의 은 - 004. 소설 작업실

 

테레사 테스탈롯사 대령은 불과 17세의 나이에 비밀군사조직 미스릴작전부의 고위 장교로서 서태평양 일대를 주 작전구역으로 하는 서태평양전대 투아하 데 다난의 전대장이자 전대의 명칭을 딴 강습상륙잠수함 TDD1번함의 함장을 겸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거기에 덤으로 매우 귀여워 보이는 외모를 가진 작달막한 체구의 그리스계 미소녀이기도 하다.

물론 이 정도까지가 아말감, 혹은 몇몇 강대국의 수뇌가 필요시 정보부서로부터 받아 볼 수 있는 보고서 상의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그 보고서에는 테스탈롯사 대령의 애칭이 텟사이고, 그녀가 실은 저혈압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며, 부하 부사관 중에 좋아하는 소년이 있지만 그 부사관은 그야말로 목석의 화신인지라 고민이 심하다는 식의 내용은 실려 있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정보는 단편적인 정보들을 단순 취합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텟사를 감시할 수 있는 근처에 고정된 정보원을 두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고, 미스릴 정보부와 작전부 방첩부서도 나름대로 할 일은 하는 중이었으니까.

그날 아침, 미스릴 서태평양전대 투아하 데 다난이 주둔중인 메리다 기지 인근에는 비가 보슬거리며 내렸다.

연구부 시설이 위치한 미합중국 텍사스 주 오스틴 카운티에서 협의를 마치고 출발, 오스트레일리아를 경유해 정기 물자 보급 임무로 편성된 C-5M 슈퍼 갤럭시 항공편을 이용, 메리다 섬에 도착한 텟사는 활주로에서부터 비서 재클린 빈란 소위, 부전대장 겸 부함장 리처드 마듀커스 중령, 육전대 부관이자 SRT 팀장 울즈 1’ 베르팡강 클루조 중위의 영접을 받았다.

대령님, 여로는 편안하셨습니까?”

항상 그렇지요. 전대엔 별 이상 없나요?”

, 별다른 이상 상황은 없었습니다.”

대표로 마듀커스 중령이 경례를 붙이며 묻자 항상 착용하던 미스릴의 황갈색 사관 정복이 아니라 검은색 위주의 단정한 여성 정장 차림이던 텟사가 살짝 힘이 없는 미소로 화답했다. 그녀로서도 근 20시간에 달하는 항공 여행은 꽤나 피곤하게 느껴졌고 더군다나 저혈압까지 겹쳐 여객기와 슈퍼 갤럭시 안에서도 사탕을 연달아 집어먹던 차였다.

칼리닌 소령은 예의 그 출장이던가요?”

그렇습니다. 현재 SRT의 사가라 소스케 중사와 양준규 하사를 대동해 출장 중입니다.”

텟사는 마듀커스 중령으로부터 보고를 받으며 제1 항공기 쉘터 내부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집무실이 위치한 B3층을 눌렀다.

제클린. 그동안 작전본부나 기타 부서에서 들어온 정보전파나 명령, 협조요청은 없었나요?”

몇 가지 들어온 게 있는데, 대령님 인트라넷 계정에 결제 요청을 올려두었습니다. 집무실에서 확인 후 결제하시면 됩니다.”

알았어요. 클루조 중위, 육전대에는 별다른 트러블이 없지요?”

, 그렇습니다. , 연구부로부터 건즈백에 업데이트 할 신형 OS를 수령했는데, 2급 경계태세 시의 프로토콜에 따라 아직 업데이트 시작은 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전대가 보유 중인 예비용 부시넬의 무인기 임무 전환 관련 중간보고서는 인트라넷으로 올려두었습니다.”

잘 했어요. 지금부터 육전대는 언제든 작전에 투입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해주세요. 실전 투입에 준합니다.”

알겠습니다.”

텟사는 작전과, 정보과, 인사과, 군수지원과 등의 전대 참모부서가 위치한 통로를 따라 걸으며 계속해서 지시를 내리고 보고를 들었다. 투아하 데 다난의 승조원 300, 육전대 요원 50, 정비대 요원 100, 기타 기지 요원 및 지원대 요원 100. 도합 600명에 달하는 대 인원을 상시 작전준비체제로 유지하고 실 작전도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진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스릴 서태평양전대의 전대장은 고작해야머리에 과학 기술 지식 약간들어있고 잠수함 작전에 대해 이론적인 지식이 있다고 감당해낼 수 있는 직위가 결코 아니었다. 웬만한 정규군의 동급 장교보다도 고도로 훈련된 전술, 작전 감각과 어느 정도의 정치력, 더불어 사람을 다루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 자리는 결코 유지할 수 없었다.

집무실과 복도의 중간 공간에 위치한 협실에 먼저 들어선 비서관 제클린 빈란 중위가 자신의 집무책상에 위치하고, 텟사는 마듀커스 중령과 클루조 중위를 대동해 자신의 집무실에 인식카드를 찍고 앞장서서 들어갔다. 그녀의 집무실은 설계 시부터 기밀실에 준한 보안조치가 적용되었기에, 예하 지휘관들에게 비밀스러운 구두 지시와 보고를 받을 때 자주 애용하던 터였다.

, 편히들 앉으세요. 마실 것 필요한가요?”

물이면 됩니다, 대령님.”

마듀커스가 대표로 그렇게 말하자, 텟사는 방 한 편의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어 잔과 함께 테이블에 가져다주었다. 그리고는 서류가방에서 자신의 태블릿 PC을 꺼내 부팅시키고 집무 책상 위의 리모콘을 들어 실내의 스마트 제어시스템을 가동시켰다. 곧이어 방 한쪽, 책장 사이의 대형 모니터가 부팅되더니 미스릴 특유의, 방패 안에 지구와 그 위에 교차한 두 자루의 검으로 이루어진 CI가 떠올랐다.

텟사가 응접 테이블에 앉아 미스릴의 통합 보안 솔루션, ‘글라우코피스의 계정인증화면이 떠오른 자신의 태블릿에 스스로의 인트라넷 계정과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뒤이어 태블릿 화면에 ‘1차 인증 확인이라는 문구와 함께 여성의 음성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보안용 음문 인식 절차를 시작합니다. 군번과 계급, 성명을 밝혀주십시오.]

군번 A7103, 대령 테레사 테스타롯사.”

[음문 패턴 인증 완료. 반갑습니다, 대령님.]

텟사가 뒤이어 태블릿을 조작하자, 방금 전에 부팅되었던 벽면 디스플레이에 텟사가 현시하기를 원한 자료가 떠올랐다. 마듀커스 소령과 클루조 중위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화면에는 마치 80년대의 홍콩 영화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한 것 같은 전형적인 삼합회 스타일의 중년 남성이 선글라스를 끼고 건물에서 나와 차에 타기 직전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

이 자의 코드명은 미스터 코발트. 아말감이 간부들에게 부여하는 코드명에는 분명히 일정한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건대, 이 자는 아말감의 중간 간부입니다.”

텟사는 인트라넷에 자신의 보안등급으로 열람 및 보관이 가능한 정보부의 자료를 디스플레이에 띄우며 말을 이었다. 이 문서가 분류된 보안 등급은 자신의 판단 하에 부하 장교들에게 열람을 허가할 수도 있는 수준이었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이 정보를 빼돌리기 위해 삼합회 내에 잠입해있던 정보부의 정보원 두 명이 어제 처형되었습니다. 홍콩 지부장 게빈 헌터 씨가 그들을 구출하려 많은 노력을 했지만 삼합회 내의 감사팀이 가차 없이 처리했다더군요.”

텟사는 어찌 보면 감당하기 힘들 잔인한 이야기를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부하 장교들에게 설명했다. 이 일은 감수성을 무디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녀는 스스로 무뎌지지 않으면 결국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파쇄당하고 말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그 두 정보원은 정보부의 정식 IO(Intelligence Officer, 정보관)가 아닌 홍콩지부의 OO(Operation Officer, 공작관)가 포섭한 삼합회 조직원이었기에 다른 언더커버나 지부에 관한 정보는 애초에 접근 권한이 없었던 관계로, 큰 타격은 아니라고 합니다.”

…….”

미스릴 정보부 홍콩지부와 작전부 서태평양전대는 아말감의 세력이 홍콩을 거점으로 하는 중국계 폭력조직, 삼합회 내부에 침투해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 지속적으로 이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미스릴 정보부 내의 두더지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은 시점에 함부로 정보부 상층부에 이를 보고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이 홍콩지부장 헌터와 텟사의 판단이었다.

텟사는 잠시 침묵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자의 코드명은 아까도 밝혔듯 미스터 코발트. 홍콩 지부의 AO(Analysis Officer, 분석관)는 이 자가 삼합회 고위직의 지원을 얻은 일종의 프리랜서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홍콩 본회의 중요간부직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 이 자가…….”

마듀커스의 중얼거림에 텟사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 자가 동남아 지역에 있어서의 아말감의 사업에 관련된 중요 인물이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약밀매부터 시작해서 위스퍼드의 수배와 포섭까지 말입니다.”



더치는 겨우 숙소에서 일어나 상회 사무실까지는 출근했으나, 답지 않게 아침나절 내내 자신의 안락의자에 축 늘어져 있었다.

더치가 안락의자에 앉아 서서히 신의 인도에 따라 휴거하는 광경을 지켜보던 베니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 덩치 큰 흑인이 이렇게까지 술에 떡이 된 광경은 근 1년간에는 분명히 기억 속에 없었다.

환장하겠군.”

더치는 안락의자에 거의 반쯤 드러누워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와중에도 고집스럽게 찾아 낀 선글라스에도 불구하고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어제의 술자리는 결국 탁구 서브 리시브 대결을 연상케 하는, 미친 듯이 폭주한 더치와 무표정하게 술잔을 받아 들이키는 칼리닌 간의 화려한 술내기로 발전했다. 로크 이하 라군 상회의 사람들과 소스케, 양준규 등은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들이키는 술잔의 개수를 세어보다가 한숨을 푹 쉬고, 떡이 되어 늘어진 더치의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 파오에게 지폐 뭉치를 던져주는 것으로 술자리를 마무리 했다.

러시아인에게 술로 싸움을 걸다니, 더치 네가 무모했던 거라고. 걔들이야 영하 40도가 아니면 추위가 아니고, 총연장 400킬로미터가 아니면 도로가 아니고, 알코올 도수가 40도가 아니면 술이 아니라고 떠드는 인종인데.”

베니의 지적에 더치가 픽 웃더니 집무책상 위로 군홧발을 올리며 특유의 궤변을 지껄였다.

시끄러. 그건 아메리카인으로서의 자존심이었어. 술내기는 남자들의 자존심 싸움이고, 그 자존심 싸움에서 러시아 코미 놈들에게 질 수 없지.”

결국 졌잖아. 애초에 그런 걸로 네 멍청한 짓을 포장하려 들지 말라고, 파트너. 게다가 그 아저씨, 공산주의자도 아닌 거 같던데.”

더치는 오늘도 아침 일과 겸 접객용 소파에 앉아 애용하는 권총 두 자루를 분해해 청소하던 레비의 몰인정한 지적에 결국 침울하게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그 칼리닌인가 하는 아저씨의 위장은 오크목제로 만든 술통일거야. 아니면 그렇게 술이 밑도 끝도 없이 들어갈 리가 없지.”

로크는 의외로 쌩쌩한 얼굴로 오전 중으로 처리해야 할 서류의 마지막 장을 검토하고 사인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 로크를 지켜보던 레비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담배 필터를 질겅거렸다.

대체 뭐야, 남자들이? 다른 남자들한테 술로 덤볐다가 이기지도 못하고 와장창 코피나 나서 처량하게 방구석에 처박히다니 말야.”

코피는 안 났어.”

어쨌든 방구석에 처박힌 건 맞잖아.”

레비, 애초에 네가…….”

레비와 로크가 그렇게 농담 따먹기인지 입씨름인지 모를 대화를 나누는데, 사무실의 출입문 관측창 너머에 제법 키가 큰 남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똑똑

들어오시오!”

절제된 노크 소리에 뒤이어, 더치는 군홧발을 내릴 생각도 않고 출입문 쪽으로 소리쳤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정장 차림의 칼리닌 이하 SRT 요원 두 명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 기세에는 마이페이스 더치조차도 살짝 기가 질리는지, 잠깐의 침묵 뒤에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 . 진짜 러시아 사람들의 혈관은 알코올이 타고 흐르는 거요? 어째 숙취한 기색이 안 보이는데.”

칼리닌은 더치의 투덜거림에 별일 아니라는 듯이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대답했다.

그거라면 이쪽도 나름대로 어제 고생했네.”

로크는 순간 거짓말 하지 마!’라고 외칠 뻔 했다. 그 만큼 칼리닌은 피곤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도 않고, 처음 만난 그 때처럼 무쇠같이 단단한 인상이었던 것이다.

그래, 칼리닌 씨. 해장은 했수?”

더치의 물음에 칼리닌은 자연스럽게 상회 사무실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레비가 오프라 윈프리 쇼를 틀어놓고는 정작 쳐다보지도 않고 있는 TV에 칼리닌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 아침에 해장용 보르시치를 (이 대목에서 칼리닌의 등 뒤에 서있던 두 사람이 움찔, 놀라는 것이 라군 상회 직원들의 눈에 생생히 포착되었다.) 끓여 먹으려고 했는데, 재료가 없어서 숙소 앞의 가판에서 쌀국수로 대강 때웠네.”

알만 하구만.’

로크는 손님들의 반응에서 샐러리맨의 단련된 눈치를 이용해 몇 가지를 추론해보았다. 결국 이 칼리닌이라는 아저씨는 극악의 요리 솜씨를 가졌지만 스스로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감히 상사의 요리에 토를 달지 못하고 들이켜야만 했을 손님들에게, 로크는 같은 월급쟁이 출신자로서 진지하게 애도를 표했다.

여튼, 이렇게 손님도 오셨으니, 오늘의 관광을 슬슬 시작해 볼까?”

더치는 느긋한 태도로 테이블에서 발을 내리며 전화기를 들었다.

첫 코스는 호텔 모스크바’. 발랄라이카의 미친개들 소굴이지. 긴장들 하는 게 좋을 걸. 충고 한마디 하자면, 열 받는다고 앞뒤 안 가리고 성질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오늘 일진은 아침부터 꽤나 사납구만.’

양준규 하사는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며, 양 옆에 서서 자신의 양팔을 잡은 남자들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잘 훈련받은 대테러 전술요원으로서, 함부로 투덜거림을 입 밖으로 흘려 상대방을 자극할 만큼의 아마추어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라군 상회의 사무실로 들이닥친 러시아 마피아들에게 두건이 덧씌워진 상태로 승용차에 구겨 넣어져 무기도 빼앗기고 30분 정도 무작위로 모퉁이를 돌며 도로를 달린 끝에, 양복 재킷의 등 뒤로 마카로프의 총구를 느끼며 어느 호텔 복도를 눈이 가려진 상태로 걸어가는 상황에 대해서 심히 만족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그와 동료들은 이런 무법천지에서 순순히 무기를 자신들에게 양도하고 눈을 가리고 손을 수갑으로 구속한 채로 따라올 것을 요구하는 무뢰배들의 말을 순순히 따를 만큼 겁쟁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때려잡는 쪽이라면 모를까. 그러나 3초 정도 고민하던 칼리닌 소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대로 순순히 무기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칼리닌 소령이 무슨 생각이 있겠지 싶었고, 오히려 일종의 PTSD 증상을 보이는 동료 소스케 중사가 반사적으로 날뛰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의외로 소스케도 얌전히 마피아들의 지시에 따르고 있었다.

.”

양준규는 순간 발밑에 깔린 카펫이 살짝 구겨져 솟아오른 곳에 구두가 걸려 비틀거렸다. 양쪽에서 그를 부축하던 마피아들의 손에 힘이 반사적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뒤이어 그들이 거칠게 양준규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 자식, 허튼 수작 부리지마.”

그와 동시에 거친 러시아식 발음의 영어가 머리 위에서 들려온다. 크라노프 하사라던가. 눈이 가려진 상태에서 녀석들 간의 대화를 통해 분석한 얼마 안 되는 정보를 떠올린 양준규 하사가 속으로 이를 부득 갈았다.

이 녀석들, 제법 위세 부리는군. 기회만 되면 본때를 보여주지.’

양준규가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앞쪽에서 걷던 칼리닌 소령이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중사, 하사. 불편하겠지만 인내하게.”

칼리닌 소령의 말은 그것으로 끝나고 더 이어지지 않았지만 양준규는 소령이 일종의 신호를 보냈음을 알아차렸다. 훈련받은 군인들에게는 뭐 특별한 기술도 아닌, 사전에 약정된 단어를 통한 일종의 암호였다.

그와 동시에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대열이 잠시 멈춰 섰다. 이윽고 앞에서 덜컥, 하고 목제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뒤에서 거칠게 미는 통에 양준규가 잠시 앞으로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 하다가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켰다.

등 뒤에 선 크라노프 하사가 거칠게 두건을 벗기자, 눈앞에 제법 고풍스러운 사무실이 펼쳐졌다. 30평 정도는 되어 보이는 방 한쪽에는 천연 티크무늬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책장에 두꺼운 양장본 서적이 가득가득 꽂혀 있고, 그 앞에 마찬가지로 오동나무 재질에 깔끔하게 양각까지 마친 집무용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바닥에 깔린 카펫에는 먼지 한 톨 떨어져 있지 않은 게, 이 방의 주인이 제법 깔끔한 성미임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사무실 한쪽에 나있는 테라스로 이어지는 커다란 창문은 검은색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머리 위에 찬찬히 돌아가는 장식용 셀링 팬이, 천장형 에어컨의 시원한 냉풍을 실내 공기와 잘 섞고 있었다.

실내에 위치한 의 수는 등 뒤의 두 명까지 합쳐 모두 8. 여섯 명은 집무용 테이블 옆의 벽에 기대어 서있거나 조그만 원탁에 앉아 카드게임을 하는 중이다. 무장 상태는 AK계열의 기관단총 아니면 권총. 하지만 다들 총에 신경 쓰지 않는 걸 보니, 이쪽을 딱히 경계하는 기색은 아니다. 아니면 우리 등 뒤의 두 명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거나.

덜컥

양준규가 그 정도까지 대강 실내 정황 분석을 마쳤을 때, 전면의 책장 옆쪽에 위치해 있던 협실의 문이 열리더니 붉은색 정장 차림의 슬라브계 여자가 등 뒤에 덩치가 대단한 남자들을 대동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움직임을 뜯어보던 양준규는 남자들은 물론이고, 이 슬라브계 여자도 정규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판단했다. 물론 여자의 얼굴 반쪽이 화상으로 뒤덮여 있는 것에는 그도 살짝 놀랐으나 기색은 하지 않았다.

상위 동지. 말씀하신 놈들을 데려왔습니다.”

수고했다, 하사 동지. 라군 쪽 눈치는 어떻던가?”

별 다른 말은 하지 않더군요.”

그래. ‘장난감이나 미행은?”

없었습니다. 권총도 압수했고요.”

알았어. , 그 녀석들 수갑은 풀어줘.”

이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러시아어 회화 능력이 없을 것이라 판단했거나 아니면 들어도 상관없다고 판단했는지, 러시아어로 거리낌 없이 계급을 지칭해가며 대화를 나눴다. 아직은 러시아어에 능숙하지 않은 탓에 뜨문뜨문 그들의 대화를 해석하던 양준규는 자신들이 꽤나 얕잡힌 모양이라며 속으로 혀를 찼다.

꽤나 만나기 어렵군, 발랄라이카 양. 잠재적인 비즈니스 상대에게 겁이라도 먹은 건가?”

유격대 내부의 대화를 묵묵히 들으며 잠시 침묵을 지키던 칼리닌이 허락도 없이 앞에 놓인 접객용 소파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러시아어가 아닌 영어였다. 그가 의자에 앉아 수갑이 풀린 양 손목을 들어 주물럭거리는 모습에 발랄라이카가 분명한 슬라브 여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쯤 되면 그녀도 칼리닌이 잘 훈련받은 군인임을 알아봤을 것이 분명했다.

발랄라이카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하며 집무용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칼리닌을 훑어보았다. 마치 암표범을 연상케 하는 미려한 곡선이 그녀의 머리 위에서부터 흘러 바닥까지 이어졌다. 분명 불에 잘 구워진 얼굴의 반쪽은 제법 무서웠지만, 그럼에도 묘한 매력이 그녀를 감싸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쪽은 누구죠?”

칼리닌.”

칼리닌은 발랄라이카의 물음에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발랄라이카는 그에게서 한번 맡은 냄새, ‘동업자의 혈향과 화약 냄새, 규율과 절도를 중시하는 분위기에게서 쉽사리 흥미를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칼리닌이라. 러시아계 이름이군요.”

발랄라이카의 의미심장한 지적에도 칼리닌은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대꾸했다.

여기선 구질구질한 과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라면 나도 자네들, 비 맞은 꼴의 비루한 개들의 뒷이야기를 굳이 청해도 상관없다는 건가?”

…….”

발랄라이카의 옆에 서있던 남자가 칼리닌의 냉소에 입술을 깨물었다.

말조심해라, 늙은이. 우린 당신이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될 만큼 긍지가 없는 게 아냐.”

칼리닌은 그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발랄라이카의 두 눈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

뒷골목 양아치처럼 허세 부리는 것은 그만둬라. 긍지라는 말은 애초에 약물과 인신매매에 손대는 놈들이 운운할만한 게 아니다.”

그의 독설에, 실내에 팔짱을 끼고 있던 유격대원들의 눈빛이 순간 바뀌었다. 양준규는 칼리닌이 그들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 틀림없다, 고 판단했다. 그것도 일부러.

뭐야?”

격양된 고함이 옆에 서있던 크라노프 하사에게서 터져 나온 순간, 양준규와 소스케의 눈빛이 동시에 빛나더니 둘은 동시에 각각 좌측과 우측에서 총을 들이대고 있던 유격대원의 팔을 제압하고, 0.5초 내에 크라브마가와 주짓수 등의 관절기를 응용한 동작으로 간단히 총을 빼앗았다. 비록 유격대원들도 역전의 정예 병사였지만 감정적으로 동요된 상태에서 비호의 몸놀림과도 같은 기습이 이루어지자 어, 하는 사이에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양준규는 오른손으로 크라노프 하사의 마카로프를 들어 총의 원 주인의 머리에 들이대며 왼손으로 그의 오른손을 꺾어 반항을 저지했다. 그리고는 바로 구둣발로 크라노프의 오른다리 무릎관절을 걷어차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한편 소스케도 마카로프를 빼앗음과 동시에 그의 오른 편에 서있던 유격대원의 정강이를 회축으로 후려쳐 쓰러트렸다. 이 모든 동작이 불과 1~2초 만에 끝났을 정도로 SRT 요원들의 몸놀림은 섬광과도 같았다.

크윽, , 개자…….”

양준규에게 팔이 제압당한 크라노프 하사가 욕을 지껄이자 흥미롭게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던 유격대원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양준규는 크라노프 하사에게 총을 겨눈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유격대원들에게 씩 웃어보였다.

거기서 손가락 하나만 더 까딱들 해봐. 참고로 내 도지어 드릴 최신 기록은 2.73초였다. 어디 내가 그 기록을 단축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지 않나?”

이 새끼들이…….”

양준규의 도발에 유격대원들은 도리어 더 분노한 기색이었다. 양준규는 침착히 다음 동작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기 시작했다. 마카로프의 탄창 용량은 8. 하지만 훈련받은 병사는 일반적으로 탄창 결합 상태에서 약실에도 실탄을 하나 넣어두니, 결과적으로 탄수는 9. 이 크라노프라는 녀석의 뒤통수에 한 방 날린 후, 연속 더블 탭으로 전방 여섯 명 중 최소 왼쪽의 세 명을 무력화 시키면, 그 사이 소스케가…….

그만.”

그러나 발랄라이카는 역시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그녀는 일촉즉발에 다다른 자신의 부하들을 단 한마디로 다스리며 다리를 꼬고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칼리닌을 향해 다가왔다. 그 태도는 우락부락한 부하들이 등 뒤에 없다면, 얼굴 반쪽에 화상만 없다면, 뉴욕 맨해튼 어느 로펌의 노련한 여성 변호사를 연상케 할 정도로 세련된 몸놀림이었다.

그녀는 이 격렬한 활극이 등 뒤에서 펼쳐지는 와중에도 소파에 앉아 눈 하나 까딱 않고 자신을 지켜보던 칼리닌을 신기한 것을 바라보는 듯이 찬찬히 뜯어보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알만 하군요. 샤슬릭(아프가니스탄의 양고기 꼬치구이) 맛은 기억하십니까?”

……그것도 10년 전 이야기지.”

칼리닌의 대답에 발랄라이카가 역시,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의 드레스 셔츠 끝단에 위치한 왼 손목에 조그맣게 세겨진 문신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알파 그룹?”

귀관은?”

칼리닌은 KGB 직속 정예 스페츠나츠 부대 중 하나를 언급하는 발랄라이카의 질문에 바로 되물었다. 그러나 이 쯤 되면 칼리닌이 스스로의 전 소속을 밝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318후방교란여단이었습니다.”

“VDV(붉은군대 공수군) 스페츠나츠인가. 얼굴의 상처도 그때 생긴 거로군.”

칼리닌은 소파의 끝에 걸터앉아 양손으로 깍지를 껴 입술을 가렸다. 찬찬히 발랄라이카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그의 눈빛에 이채가 맺히는 찰나, 발랄라이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피야 이리노스카야 파블로비나.”

그래……. 파블로비나 상위 동지. 기억하네. 나는 아니었지만 내 동료들이 그때인근에서 작전 중이었다네.”

발랄라이카는 칼리닌의 대답에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잠시 깨물더니 억지로 굳어버린 표정을 풀며 말을 받았다. 그녀로서도 떠올리기 내키지 않은 과거였음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알파 그룹의 호랑이 칼리닌 소령에 대해서 들은 기억이 나는군요. 아마도 제가 전역한 이후에 마지드 체포 명령을 받았지만 거부하고 조국에 반역했다던가요.”

…….”

발랄라이카는 칼리닌의 침묵을 바라보며 자조적으로 픽 웃었다. 아무래도 퇴물이 된 마피아 주제에 조국 운운한 것은 스스로 말해놓고도 참 어처구니가 없던 참이었다. 그래서 성미대로라면 평소에 덧붙이지 않았을 말꼬리를 굳이 이었다.

, 별 상관없는 이야기죠. 이 바닥에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에게는.”

그래. 별 상관없는 이야기지.”

칼리닌이 별 다른 동요 없이 그렇게 동의하자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내리깔렸다. 기본적으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한 소련군 출신자들로 구성된 유격대원들은 물론이거니와 상관의 뒷이야기를 처음 전해들은 양준규 하사도 상당히 놀란 기색이었다.

다들 무기는 내려놓죠.”

이윽고 한결 부드러워진 발랄라이카의 말에 그제야 SRT 요원들에게 제압되었던 크라노프와 다른 유격대원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준규와 소스케도 총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들은 권총을 돌려주는 대신, 그것을 정장 재킷 안쪽, 겨드랑이 근처에 착용하고 있던 홀스터에 집어넣었다. 그것을 본 크라노프가 입술을 깨물며 동료들 쪽으로 걸어갔다.

발랄라이카는 칼리닌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양준규는 그것이 사냥을 앞둔 암호랑이의 그것 같다는 생각에 긴장을 쉽사리 풀 수가 없었다. 그건 소스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스스로도 느끼는 것이지만, 여차하는 순간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홀스터에 집어넣어 권총 손잡이를 잡을 것이 분명했다.

뭘 원하시나요, 소령 동지.”

그러나 칼리닌은 부하들이 긴장하거나 말거나, 여유롭게 다리를 꼬더니 등받이에 등을 기댄 여유로운 자세로 발랄라이카를 바라보았다. 평소 부대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세에, 양준규는 칼리닌이 기세싸움에서 밀리지 않기로 결심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상위 동지. 미스릴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 있나?”

칼리닌의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발랄라이카가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좋아하긴 하지만, 이 자리에서 설마 영국 제국주의자가 지은 시답잖은 동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닐 거라고 봅니다만.”

발랄라이카는 그렇게 제법 공산주의 사상이 투철한 언어로 대답했으나, 그 대답의 내용과 말투에는 공산주의를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 투철한 공산주의자는 단 한 명도 없는 관계로, 어느 누구도 그것에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시답잖은 동화 이야기가 맞네.”

칼리닌의 대답에 발랄라이카가 다시 의외라는 듯 동공이 커졌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발랄라이카가 품속에서 시가 케이스를 꺼내 열며 입을 열었다.

최근 이쪽 업계에 떠돌기 시작한 소문이 있는데……. 미국이나 소련보다도 수십 년은 앞선 기술의 무기로 무장하고 마약 밀매부터 해적질까지, 순식간에 나타나 전부 두들겨 패고 귀신처럼 사라져버리는 정체불명의 용병들과 관련된 이야기죠. 혹시 흥미 있으신지요?”

…….”

발랄라이카는 아마도 칼리닌의 침묵을 긍정이든, 수긍이든, 자인이든 여하튼 포지티브한 반응으로 받아들인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 녀석들 이름이 미스릴이라고요? 악을 멸하고 빛을 밝히는, 전설 속 파사破邪의 은? , . 성 게오르기우스께서 들으셨다가는 웃다가 돌아가실 게 뻔하군요.”

며칠 전에 그분하고 개인적으로 면담을 해보았는데 돌아가시지는 않았던데. 물론 많이 웃기야 하셨지.”

발랄라이카가 픽 웃으며 시답잖게 농담을 던지자, 역시 칼리닌도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며 시답잖은 농담으로 받아쳤다. 그걸 고스란히 듣고 있던 양준규는 등허리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들…… 혹시 소련군에서 복무 할 때에는 다른 수많은 소련군들마냥 이렇게 되도 않는 허무개그로 시간을 때웠던 건가.

양준규가 속으로 나중에 쿠르츠에게 이 에피소드를 이야기 해줄까 말까 고민하는데, 발랄라이카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서로 탐색전은 대강 마무리 짓는 모양이었다.

소령 동지가 그 미스릴의 소속이라는 건 잘 알겠습니다. 그럼 여긴 왜 오신 거죠?”

칼리닌은 여유로운 태도로, 접객용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주전자로 잔에 물을 따라 입에 가져가며 짧게 대답했다.

비즈니스 차.”

정의의 군대의 비즈니스라면…….”

발랄라이카가 그렇게 말꼬리를 흐리자, 칼리닌은 그에 대한 대답 대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상위 동지. 아말감이라는 단어는 들어보았나?”

…….”

이 밑도 끝도 없는 선문답에 유격대원들이 어안이 벙벙한 시선을 던졌다. 그쪽과 시선을 마주친 양준규 하사가 씩 웃어보였다. 나도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네, 곰탱이들.

칼리닌은 아까와 달리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려 마음먹었는지 물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아말감. 자네도 알다시피, 수은과 다른 금속을 합성한 합금을 말하지. 하지만 실제로는 치과의 충전재 따위가 아니라, 고도로 잘 훈련받고 잘 무장한 무력집단이네. 그리고 우리의 적이기도 하지.”

……파사의 은의 적이라면, 로겠군요.”

발랄라이카의 지적에 칼리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 도시의 어떤 조직이 예의 아말감과 닿아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네. 참고로 자네들의 상위조직인 호텔 모스크바와 아말감 간의 연관성은 애저녁부터 밝혀져 있던 참이지.”

……그래서 일단 말단인 우리 부대부터 밟아놓으시겠다는 겁니까? 이거, 아무리 예전의 전우였다고는 하지만 웃으며 넘길 수만은 없는 말씀이로군요.”

발랄라이카는 칼리닌의 말이 유격대에 대한 위협이라고 판단했는지 한층 표정을 굳히며 날카롭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칼리닌은 한술 더 떴다.

우리도 웃으면서 하는 말이 아닐세. 이래 뵈도 엄연히 이쪽의 비즈니스라서 말이야.”

…….”

양준규는 아까와는 다르게 무시무시한 공기가 감도는 실내의 분위기에 식은땀을 흘렸다. 칼리닌 소령은 어쩌자고 이들을 자꾸 자극한단 말인가?

칼리닌은 그런 양준규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아말감과의 관련성이 호텔 모스크바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라서 말일세. 아니, 이 도시의 잡놈들상당수가 그쪽과 어떻게든 연줄이 있을 수도 있겠지.”

…….”

솔직히 말하면 귀관과 귀관의 부대는 호텔 모스크바와는 거의 반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지. 그건 러시아 출신 레드마피아들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고. 우선순위의 차원에서라도, 우리는 자네들을 먼저 손봐주러 온 건 아닐세.”

발랄라이카는 속으로 생각했다. 표트르 대두목이 직접 연계되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본대의 간부 중 한명이?

그러나 발랄라이카는 복잡한 계산을 하는 와중에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느긋한 태도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말은 차후에는 손봐주러 올 수도 있다는 뜻이군요.”

물론이다.”

칼리닌의 단호한 대답에 실내의 유격대원들은 전부 벙 찐 모양이었다. 심지어 발랄라이카마저도 살짝 굳은 표정으로 칼리닌을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실제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미국에서도 이제야 시험 가동 중인 최첨단 AS가 우르르 몰려나온다면, 최첨단 AS는커녕, RK-92 리베니나 심지어 아프간전 초반에 투입되었던 구형 RK-91조차 한 대도 없는 유격대는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아프간에서 AS를 타고 게릴라들을 사냥하던 역전의 소련군 용사들이 이제는 거꾸로 사냥을 당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었다.

위기감을 느낀 발랄라이카가 딱딱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단호한 대답이군요.”

아까도 말했지 않나. 마약, 무기의 불법유통은 징벌한다. 그게 우리 쪽의 비즈니스. 이래 뵈도 우리 회사는 그런 쪽으론 철저해서.”

발랄라이카는 칼리닌의 대답에 한숨을 쉬며 아까 전에 열어두었던 시가 케이스에서 한 개비를 집어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동봉된 나이프로 끝을 자르고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왜 우리에게 하시는 겁니까? 우리 같은 떨거지 마피아놈들에게 그런 무지막지한 뒷 세계의 이야기를 하시다니요. 이거, 할 수만 있다면 기절하고 싶은 심경이로군요.”

오랜만에 느껴보는 무력감이 그녀의 몸을 휘감는다. 하지만 그것이 이 도시에 흘러들어와 도시를 평정하고 난 이래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인 것도 분명했다. 덕분에 흥미가 일었다.

칼리닌은 그런 발랄라이카의 물음에 안색하나 바뀌지 않고 입을 열었다.

경고 겸, 인사다.”

……호오?”

발랄라이카는 의외의 대답에 다시 한 번 눈썹을 치켜 뜰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칼리닌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내심 칼리닌의 의도를 대강 이해한 발랄라이카도 더 질문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소령 동지의 경고, 단단히 머리 속에 새겨 두겠습니다.”

…….”

그리고, 소령 동지의 인사는……. 받을지 안 받을지 결정한 후 다시 연락드리죠.”

칼리닌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 없이, 투버튼 형식의 정장 외투 앞섶을 다시 잠그며 대답했다.

기대하겠네, 상위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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